시간은 계절을 향해 수인처럼 끌려간다. 아무 잘못도 없는 변화는 무정한 얼굴로 시퀀스를 실행하고, 우리는 삶으로부터 들려오는 성공과 실패에 관한 두려움과 고독을 듣는다. 사람들이 내다버린, 계절 지난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있는 작은 노란 참외꽃을 본 적이 있다. 앙상한 줄기에 가까스로 피어난 작은 꽃이고 열매를 맺을지 알 수 없는 가련한 참외꽃이지만, 그 아련한 모습에서 저린 아픔이 느껴졌다. 그 참외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할 바를 다하지 못한 사연으로 남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삶은 삶이다.
나는 이념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유닛의 자유에 관계된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여러 면에서 슬라브주의자였던 콘스탄틴 악사코프(Konstanin Aksakov 1817 ~ 1860)는 러시아의 초기 아나키스트로 거론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시각으로 인간의 양심과 법률, 자유와 강제의 길 사이에서 대비되는 인간상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왜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국가가 아무리 넓고 자유롭게 발전한다 하여도, 그것이 어느 날 우리가 바라는 극단의 민주주의의 형태에 도달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시 강제의 원리, 외부의 압박의 원리-일정한 구속상태, 하나의 제도-에 머무를 것이다. 국가가 발전하면 할수록 국가는 더욱 더 강력하게 인간의 내적 세계를 지배하고 더욱 엄중하게 인간의 사회화를 규정하게 된다. 만일 자유주의국가가 극단의 형태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국가의 관리, 자기 스스로의 경찰이 된다 하더라도 국가는 최후에 가서 인간 속에 살아 있는 영혼을 파괴할 것이다. .... 국가의 이것 혹은 저것의 형태 속에서가 아니라 이념으로서 혹은 원리로서의 국가 그 자신 속에 거짓이 있다. 우리들은 국가의 특수한 형태에 있어서 선악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 거짓인 국가를 검토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국가는 아무리 최선에 이른다 하더라도 인간의 행위와 의지를 강제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강제로부터 파괴되는 러시아의 자유로운 영혼을 자신과 무관한 사항으로 외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악사코프는 그들의 문학사에 빛나는 위대한 슬라브주의자들과 같이 근대적 형태의 국가를, 그것이 독재적이든 민주적이든 거부하였다. 게르첸(Alek sandr Gertsen, 1812 - 1870)은 그를 가리켜 "그의 전생애는 억압된 러시아 민중의 이름으로 관료주의 러시아에 대한, 페테르부르크 시대에 대한 철저한 반항이었다."이라고 말하였다. 문인(文人) 악사코프에게 국가는, 특히 서유럽적 국가는 부정해야 하는 무엇이었으며 저항해야 하는 무엇이었다. 악사코프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와 같이 어느 의미에 있어 과거회귀적인 러시아를 꿈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자들은 이제 그들의 곁에서 사라질 황금시대와 목가적인 러시아에 대한 슬픔과 연민, 그리고 미래라는 이름의 암울한 희망 사이를 왕복하고 있는 마법의 원(圓)과 같이 슬라브 문학을 손에 들고 똑딱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시절은 이제 다 사라지고 있다고.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폭동과 반란은 이념으로서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 그들을 억압하고 통제했던 사회의 부당한 차별과 고된 삶과 굶주림과 가난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들은 고상하고 논리적인 지식인이 내세우는 항의의 표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절망적 상황에 대항해 일어난 것이며, 그들의 살(肉) 속으로 파고드는 부당한 고통에 대해 일어난 즉흥적인 욕설과 같은 것이었다. 게르첸은 망명지에서 잡지 『종』을 통하여 러시아의 혁명사상을 고무하려고 수년에 걸쳐 거의 혼자의 노력으로 기고한 글을 통하여 그의 목적에 집념하였다. 그는 평화롭고 건설적인 혁명을 원하였으나 동시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그가 꿈꾸는 혁명은 결국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아들에게 보낸 1855년의 편지에, "우리들은 파괴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말씀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고 낡은 거짓을 파괴한다. 근대의 인간, 저 우매한 교황은 하나의 교각만을 건설하였을 뿐이다.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은 미래의, 미지의 인간일 것이다. 너는 그러한 인간을 만나기 위하여 그곳에 있어도 좋다. 하지만 숨어있지 않기를 바란다. ... 반동의 구빈원에 보호를 구걸하기보다 혁명으로 죽는 편이 좋을 것이다."이라고 썼다. 서유럽의 정치가들이 생각한 러시아의 아나키즘, 혹은 사회주의는 역립한 러시아적 전제정치의 다름 아닌 것이었다. 그 혼란은 서구의 정치적 목적과 이상(理想)과는 다른 부정직한 욕설이거나 히스테리와 같은 것이었으며, 따라서 일정한 경계를 긋고 주시해야 하는 산불과 같았다. 서유럽의 많은 지식인은 로마노프왕조가 러시아에서 무너진 원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히스테리가 그들의 네트워크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늑대 보나파르트를 두려워한 아이들처럼 러시아의 혁명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두려움의 무게만큼 마늘과 십자가를 문설주에 걸어놓고 문을 잠가놓았다. 러시아는 서유럽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힘으로 일어서거나 죽어야 했다. 나중에야 사람들은 보나파르트가 작은 체구의 보잘것없는 늑대였다는 사실을 알고 과장된 두려움에 실소하였듯이 러시아에 의해 서유럽에 던져졌던 거대한 불안의 실체를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역사는 진실이나 욕망만으로 그들이 의지하는 사항을 이루어낼 수 없다. 문학은 언제나 문학으로 남고 불가능은 언제나 불가능으로 남는다. 비가역으로 떠난 것은 다시 화면을 되돌린다고 죽은 목숨이 본래의 위치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사건지평선을 넘어선 정보는 다시 복원되지 않으며, 질량은 물리법칙이 지켜보는 한 빛을 넘어서지 못한다. 불가능은 불가능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어떤 사항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진실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영혼은 없다. 인간은 철저히 현실의 질서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국가는 아무리 최선의 체제를 만들어낸다 하여도 인간의 행위와 의지에 간섭하지 않을 수 없고 통제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눈에 드러나지 않는, 우악스럽지 않은 보다 더 정교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통제하고 제도하는 길을 모색할 뿐이다. 아나키스트의 문학은 문학으로 남고 꿈은 꿈으로 남는다. 자유로운 영혼은 없다. 그것은 아나키스트의 말과 이념과 문학으로 남을 뿐이다. 사회 권력의 관할구역에 위치한 모든 인간의 영혼은 강제된 영혼이며, 제도된 영혼이고, 질서에 편입된 영혼이다. 현실과 질서와 권력의 언어가 그 언어로 집필하는 것이 삶이고 그 삶은 아름다운 것도, 신성한 것도, 더러운 것도, 순수한 것도, 억울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내었을 때와 해내야 하는 일을 해내었을 때 어느 기쁨이 더 큰가 비교하면 된다.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 삶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인간과 해야 할 일을 하는 인간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으며 또한 만인의 내면에 관념될 수 있겠는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내었을 때와 해야 할 일을 해내었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박수를 보내겠는가? 사회의 진화란 인간의 해야 할 바를 유닛이 하고 싶은 바와 교묘하게 구성하는 일이다. 과거의 노예와 오늘의 노동자는 다른 구성이나 비율이 아니다.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들은 유닛에게 배포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설정을 자본주의만큼 고민하지 않았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 ~ 1883)와 게르첸의 삶을 이해한다. 그러나 오늘의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노동자의 길을 걸어간다. 밤 늦게까지 소파에 반쯤 누워 TV를 시청하고 시간이 되면 일어나 직장으로 출근한다. 그들은 사회에 제기해야 할 문제보다 프로야구 승패에 더 반응하고, 유명 연예인이나 비리 정치인을 성토하는 술자리 논쟁에 참여하며, 주말 어느 먹거리를 찾아갈 것인가를 두고 더 고민한다. 그들에게 체 게바라는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인물이다. 근처 뒷산에 올라 넓은 바위에 앉아 도시를 내려다본다. 뿌연 시야 속으로 도시는 출판물 표지처럼 배열되어 있다. 저 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사연이 부침하였을까 생각한다. 가져온 배낭에서 사브레 과자를 꺼내 요기를 한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바라본다. 바다는 파란색이라는 통념과 무관한 회색빛이다. 사브레라는 이름의 과자는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여 온 것 같다. 이 과자를 처음 먹어본 것은 아주 아득한 어느 겨울이었다. 동생과 함께 놀다 늦게 돌아온 어두운 밤, 계모는 무슨 이유인지 때리기 시작하였는데 딱딱하게 얼어 있는 슬리퍼로 머리를 맞는 순간 뜨듯한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사브레를 사주었다. 동생과 나는 사브레를 먹으며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맛을 느꼈고, 그러한 맛이 내가 사는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야생의 환경에서 호모 사피엔스에게 단맛을 구하는 일은 상당히 귀한 일이었다. 단맛은 생장하는데 긴요하며 또 늘 부족한 물질이었다. 그래서 유전자는 본능에게 부탁해 단맛 위에 기쁨의 표시를 해두도록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특히 어린 아이는 단맛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여러 맛 가운데 가장 선호하게 되어 있다. 지금은 단맛 과잉시대다. 거의 모든 과자와 음식에 단맛이 필요 이상으로 첨가되어 있다. 기업은 그래야 팔린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해야 인간이 선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1936년 여름과 가을, 스페인의 파시즘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은 몇 해 동안 격렬하게 저항한 시민의 힘으로 천년왕국을 가져오게 할 정열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카탈로니아 지역과 아라곤의 일부, 그리고 마드리드와 아스토리아스에서 그들은 빛나는 승리를 거두어 그들 도시와 지역에서 그들이 말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구해내었다. 수개월동안 이들 지역은 인민전선이 통제하는 민병부대에 예속되어 있었다. 공장은 대개 노동자들에게 접수되어 위원회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토지는 분할되든지 공유화되었다. 인민전선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의 생활은 매우 세심한 곳까지 외형이 바뀌어갔다. 이 일은 “카탈로니아 찬가(Hom age to Catalinia)”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우세하였던 때의 바르셀로나를 여행한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 ~ 1950)에 의해 기록되었다. "모든 상점과 제과점에는 그것이 공유되었다는 간판이 걸렸고, 구두닦이조차 공유화되어서 그들의 도구통까지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급사(給使)나 상점점원들도 손님의 얼굴을 쳐다보며 대등한 위치에서 취급되고 있음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는 인사나 어투, 또는 의례적인 말씨조차 일시에 자취가 사라졌다. 도심의 누구도 '세뇨오르'(Senor)라든가 '돈'(Don), 또는 '당신'(Usted)라고 말하지 않고 '동지'(Comrade) 혹은 '너'(Thou)라 불렀다. '안녕하십니까?'(Buenos Dias)라 말하는 대신 '경례!'(Sal udi)라 인사했다. 개인 소유의 자동차는 한 대도 없이 모두 증발되었으며, 모든 전차, 택시, 그 밖의 모든 교통기관에는 예외 없이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혁명의 포스터가 모든 거리마다 날리고 있었고, 눈부신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벽이란 벽은 모두 불붙어 타오르는 듯하였다. 덕택에 조금 남아 있는 과거의 광고는 진흙으로 칠해 지워버리고 싶을 지경이 되었다. 인파가 언제나 분주한 시가의 중앙, 넓은 통로를 내려가면 확성기에서 혁명가가 종일토록 깊은 밤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기이한 것은 군중의 복장이었다. 외견상으로는 부유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거리였다. 소수의 부인과 외국인을 제외하면 '잘 차려 입은 사람'은 전혀 없었으며, 잘 차려 입는 것이 마치 죄악이나 치욕이 되는 듯한 광경이 되었다. 누구든지 조잡한 노동계급의 복장이거나 남색의 작업복이거나 여러 가지 민병대가 입고 있는 군복이었으며, 이것들 모두가 기묘하게도 감동적이었다." 스페인과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순수한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의 열정은 지식인에게 그들이 성취한 것 이상의 오욕을 남겼다. 러시아 대지 위에 뿌려진 수만의 목숨과 스페인 도시 벽면에 파편처럼 튀어 흩어진 죽은 이의 혈흔은 역사의 선로에 흘렀다. 그러한 목록을 지불하면서 성취해야 할 무엇이 있다고 믿었던 이념이 뿌리고 간 욕망을 향해, 세상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든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어리석음, 그리고 구원해야 할 대상이 있다고 믿었던 믿음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보다 완전한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는 필요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는 죄악이 되기도 한다. 아나키스트가 그러했으며, 사회주의 러시아가 그러했고, 나치가 그러했으며, 킬링필드가 그러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정의와 진실의 명패를 내세우고 있을지언정 네트워크에서 운용되고 있는 정확한 명패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그와 연결된 네트워크로부터 엄청난 정보를 주고받는다. 그 정보로부터 만인의 내면에 관념하는 바가 무엇인가 알아내고 그를 통해 진실이 무엇인가 이해한다. 만인이 관념하는 진실과 특정 네트워크에서 유통되고 있는 진실이 일치하지 않거나 뒤틀릴 때, 포털 사이트 점유율은 기형화되기 시작하고 분쟁이 야기되며 신뢰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네트워크는 현재와 동기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과거와도 동기화되어 있다. 과거로부터 전송된 정보와 현재의 정보를 통하여 만인이 관념하는 진실이 구축되며, 특정 네트워크에서 유통되는 진실이 만인이 사용하기에 부적합하거나 부적절하거나 성능 부족으로 드러나거나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혹은 인간 본성에 반(反)하거나 거짓이 포함되었거나 위선이 포함된 것으로 판명되면, 그 진실은 유념의 표지를 달고 저절로 확산금지 목록이 된다. 확산 금지된 목록 가운데 만인의 관념으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목록은 유통이 차단되거나 삭제된다. 대규모 네트워크에서 유통되는 진실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아나키스트의 진실은 전체 네트워크를 통해 실현 불능의 진실로 처리되었고, 러시아의 진실은 부적합으로, 나치와 킬링필드 진실은 위선으로 처리되었다. 유통 가능한 진실이 있고, 부적합한 진실도 있으며, 실현 불능의 진실도 있다. 실현 불능의 진실은 비록 순수한 의지를 지녔다하더라도 위선의 진실 못지않게 역사에 상처를 남긴다. 삶은 어디까지나 삶이다. 진실을 위해 삶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삶을 위해 진실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전체 네트워크는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열려 있으면 열려있을수록, 많은 정보가 처리되면 될수록 그들이 처리하는 운영 능력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신의 지혜에 접근한다. 인간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다. 링 위에 올라가야 하는 출전명단이다. 유닛은 경기방식과 룰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고 고칠 권한이 없다. 또한 심판을 교체할 권리도 없을뿐더러 경기 종목이나 진행속도, 경기장 위치, 코치진, 채점기관, 경기시간, 조명위치 등을 지정하거나 권고할 기회도 없고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다. 유닛에게 허용된 자유는 경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열심히 할 것인가 대충할 것인가, 반칙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에 국한된다. 최선을 다하든 대충하든 포기하든 그것은 유닛이 결정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유닛은 결정해야 한다. 결정은 유닛이 하고 결과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승리하는 경우도 있다. 운이 좋은 경우다. 최선을 다하고도 지는 경우도 있다. 실력이 부족했거나 운이 나쁜 경우다. 그러나 각각의 유닛에게 어느 운이 언제 어떻게 작용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최선을 다할 것인가 아닌가는 유닛이 결정한다. 그 외 다른 사항은 유닛이 어쩌지 못하는 사항이다. 생각해보라. 계절 지난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난 노란 참외꽃에게 자유가 있겠는가? 노란 참외꽃과 우리가 자연의 질서 앞에 얼마나 다르겠는가? 어렸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되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되도록 빨리 시간이 지나가 빨리 어른이 되기를 기도했었다. 빨리 어른이 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보니 어떠한가. 어렸을 때 기대하던 그 세계이던가. 빨리 어른이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였는가 후회하였는가. 아니면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담담하게 생각하였는가. 이념이란 그와 같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 제안되고 발의된 유닛이다. 우리들 가슴 저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어떤 필연성과 객관의 세계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고 어떻게 링크되어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사회의 자기조직화를 이루는 힘과 인간의 유전자에 흐르는 힘은 동일한 필연성으로부터 나온 두 줄의 나선형 원리이다. 동일한 소스가 각기 다른 위치에서 객관과 주관으로 행사될 뿐이다. 이 소스에 의해 작동하는 모든 존재를 우리는 유닛이라 부른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쓰레기더미 위에 핀 노란 참외꽃과 인간의 운명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운명으로부터 개시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기쁨일 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슬픔일 수도 있으며, 자긍일 수도, 비참일 수도 있다. 끝까지 뛸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최선을 다할 것인가 대충할 것인가, 반칙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최선을 다하기 위해, 혹은 다하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경기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라 패배를 뜻한다. 또한 반칙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는 조건과 환경이 만들어내는 확률이 관여하며, 그러므로 결국 열심히 할 것인가 대충할 것인가만이 남고, 이것이 우리에게 허용된 자유의 정확한 총량이다. 출전 명단은 이미 제출되어 있고, 우리는 링 위에 서있다. 인간을 자유라 부르지 말라. 이 세상 어디에도 자유로운 영혼은 없다. 무고한 희생은 없다. 대충 살아도 삶이고 최선을 다해 살아도 삶이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다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한번뿐인 삶인데 지독하게 살아봐야 무엇이 남겠는가. 또한 한번뿐인 삶인데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 맞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그것이 유용한 것이고 적절하며 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필요한 사항이라고 제안되는 경우, 그것은 불가피하게 유닛의 의지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의지가 지향하는 방향이고 이 결정은 신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된다. 또한 자신이 살고 싶은 사항은 내려놓고 해야 하는 바를 위해 노력해도 된다. 신념이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살고 싶은 대로, 또는 살아야 하는 대로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더불어 하고 싶은 바와 해야 할 바를 짊어지고 산다는 점이다. 유닛이다. 어느 삶이나 불운한 경우는 있다. 그렇다고 책임지지 않을 수 없다. 행운도 있다. 그렇다고 책임질 내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전 명단에 포함되었고, 링에 올라섰으며 시대와 동료와 훗날의 인류가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아득한 날로부터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출사(出仕)된 희생이다. 인류의 역사에 위대한 톱니바퀴로 기억되는 그들과 더불어 어느 경우에도 무고한 희생은 없다. 모두 치러야 할 대가(代價)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속한 네트워크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운명을 지녔다. 우리는 사물과 현상을 필요에 의해 보도록 진화되었으며, 그 의식의 창을 통해 사물과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한다. 사회는 지향이다. 하지만 사회는 적어도 소위 지식생산자들이 말하는 향상과 나아짐을 향해 흐르는 강물이 아니다. 대규모 네트워크에서 거래되는 진실이 향하는 지향이다. 때로 거짓된 낭떠러지 폭포도 있고 선동된 격류도 있으며, 권력의 의한 정체도 있고 협곡도 있다. 마야문명과 잉카제국은 무슨 이유인가 단위 네트워크에서 교환되는 정보를 차단한 뒤 찬란한 문명을 내려놓고 사멸하였다. 그들의 지적 수준이 낮아서, 또는 진실이나 욕망, 이념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네트워크 단절이 가져온 필연의 결과일 뿐이다. 사회의 자기조직화는 지식생산자를 동원해 해야 할 바를 유닛이 하고 싶은 바의 확장자로 변환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한다. 또한 각 유닛의 내부에서 동의를 구하는 의식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로비 또한 담당한다. 그리고 네트워크 구성원의 욕망과 갈등을 조절해야 하는 책임도 짊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거대 네트워크이다. 천 단위와 만 단위, 억 단위, 조 단위의 네트워크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되는 것이고, 그 단위에서 생성되는 톱니바퀴 역시 전혀 다른 유닛이 되는 것이다. 유닛은 사회구조 아래 흐른다. 자유로운 영혼은 없고, 독자적인 지향도 없으며, 창조된 의지도 없다. 군중 안에 포함된 한 마리 개미에게 자유가 있을 리 없다. 저항은 어디에나 있다. 뜻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희생된다. 어디까지나 삶은 삶이고 일회용은 일회용이다. 결정은 당신이 한다. 그러나 자유는 아니다. sang1475@naver.com *필자/푸른달빛 방인상. 칼럼니스트.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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