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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지혜가 끝나는 곳에 신의 지혜가 시작

거룩한 행보를 위한 예정된 희생

푸른달빛 방인상 | 기사입력 2013/04/26 [15:53]

인간 지혜가 끝나는 곳에 신의 지혜가 시작

거룩한 행보를 위한 예정된 희생

푸른달빛 방인상 | 입력 : 2013/04/26 [15:53]
오랜 진화의 지층에 쌓인 본능과 유전자가 써넣은 문항이, 혹은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어떤 기억이 내 의지와 행위 전체, 혹은 일부를 조정하고 있거나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뜻을 지니는 것일까? 내 개인적인 성향, 기울기, 욕망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느 사안에 대해 이유 없이 거부하고 회피하는 반응, 그리고 삶에 대한 염원이나 신념 등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방식으로 나와 닿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퍼스낼리티는 어떤 연관을 가지고 내 삶에 작용하고, 나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고 어떤 답을 자기 손에 들고 있을까? 사는 일에 무슨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처음 그들의 음악을 듣는 순간 극감(極感)에 떨어질 것 같았던 뉴트롤스의 음악은 피부적인 선율 속에서 하나의 진의를 느끼게 했었다. 비토리오 데 스칼지가 이끄는 이 밴드는 음악에 대한 그들의 노력을 나름의 방식으로 선연하게 그려 넣었다. 나는 뉴트롤스를 들으며 그것이 내 개인적인 취향과 어떤 연관을 지닌 것인지 생각해야 했고, 그것이 내 삶 어느 부분에 닿아 있는가를 생각했다. 왜 그렇게 느껴야 했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인도에는 비슈누(Vishnu) 축제기간에 크리슈나(Krishna) 신상(神像)을 모신 거대한 차량의 바퀴에 뛰어들어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 신상을 모신 산차에 치어 죽으면 극락왕생한다는 민간신앙이 전해져오기 때문인데, 그 입증된 적도 없고 실증할 수도 없는 통속의 믿음 하나에 삶을 내던지는, 바퀴에 깔려 죽는 이들이 있고, 이러한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외국인은 미신스럽게 생각하였다. 어느 종교학자가 그렇게 자진하여 신상 바퀴에 뛰어드는 행위를 저거너트(juggernaut)라고 이름하였다. 저거너트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는 대형버스나 트럭을 뜻하는 말로, 종교심리학에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이나 관념, 미신(迷信)에 의해 과도하게 분출되는 상식을 벗어난 행위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축제기간 크리슈나 신상에 저거너트를 행하는 이들의 의식에는 무엇이 깔려있어 저거너트를 내놓아야 하는 경계에 이르렀으며, 어떤 정서가 그 행위와 의지를 신념하고 담당하였을까? 본능은 왜 아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까?

1974년 아프리카 하다드 사막에서 발굴된 350만 년 전 유인원 뼈 한 조각을 통하여 현생인류는 모두 루시라는 한 여인의 몸을 통하여 지구상에 발원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50만 년 전 직립원인이었던 루시는 어떤 욕망에 의해 생겨났으며,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삶이 미래의 모든 인류의 삶과 죽음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認知)하고 있었을까? 세상 천지만물은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오전 10시에 창조된 것이라고 어셔(Ussher 1581-1656)주교는 계산해내었다. 그것은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수명과 기록을 정밀하게 계산하여 얻은 결론이었는데, 17세기 당시 대다수 카톨릭 신자들은 어셔주교의 성서를 바탕으로 하는 창세의 해석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살았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나에게 혹은 너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그것은 결국 대답할 수 없는 항목인지 모른다. 루시가 자신의 운명을 어쩌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가르는 바람과 물길을 어쩌지 못한다. 유창한 삶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나 각박한 삶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나 그것은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한 가닥도 되지 않는 부(富)와 영예를 위해 우리는 근육을 팔고, 더러움을 뒤집어쓰고 모멸을 참아가며 삶을 산다. 르누아르는 관절염 통증에 시달리면서 가죽 끈으로 붓을 손에 끼워 묶고 최후에 다다를 때까지 그림을 그렸고, 박정희는 절망의 최하단에서 백선엽 대령에게 한번 도와줄 수 없겠냐고 구명(求命)했으며,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담보로 목숨을 들고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누군가는 전장에서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며, 누군가는 푼돈을 마련하기 위해 노인의 등 뒤에서 망치를 내려치고, 누군가는 처연한 목숨 하나 때문에 무료급식소를 찾는다. 삶을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처절하게 노력하여 이루어야 하는 사안이라는 이 테제는 언제 누가 만들고 배포하여 지평에 거류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을 포함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시스템이 각자의 자유와 가치와 퍼스낼리티를 억압하고 외면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그어진 인간의 사회적 성향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 명, 혹은 만 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집단이 어느 시공에 우리와 단절된, 어떠한 문명적 접촉을 갖지 않고 그들 자체의 성능으로 그들의 문화와 삶을 조성한다고 하였을 때 그들에게 권력이 발생하지 않겠는가? 또 그 질서에 반(反)하는 범죄가 발생하지 않겠는가? 타부와 반목과 증오와 사랑과 연민과 경쟁과 음모가 생겨나지 않겠는가? 갈등이 있을 것이고, 이기는 쪽이 생길 것이며, 지배계급의 발현과 아울러 파레토 법칙을 근간으로 하는 피지배계층이 사회의 한 측면으로 조성될 것이고, 그들 나름의 정신적, 도덕적, 예술적 체계를 이루어낼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갖춰가는 과정을 우리는 자기조직화라 부른다. 그리고 그 자기조직화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근원적 필연성이 개입되고, 그 필연성을 기반으로 다만 조건과 확률에 의해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전개되거나 나름의 형식을 갖춰가는 것이다. 
▲ 레비스트로스     ©브레이크뉴스

레비스트로스(C. Lévi-Strauss, 1908-2009)는 인간정신이란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통하여 작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현대사회와 원시사회의 차이를 문명과 야만, 혹은 논리와 비논리로 대비시킬 수 없다고 보고, 원시적 사고방식은 삶의 세계에 포함되는 모든 문제와 사실들을 총체적인 체계와 질서 속에서 추상화하는 것이고, 문명적 사고(思考)란 특수한 몇 개의 영역들만을 구분하여 취급하는 제한적 결정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분류하였다. 결국 두 개의 사고방식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란 원시 사고가 총체성을 지향한다면, 현대의 시각은 개별적 변화에 주목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원시사회를 야만적, 미개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명의 편견일 뿐이며, 비록 원시사회가 기술적으로 낙후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나름대로의 합리성과 조화 그리고 인간다운 만족과 기쁨을 향유하고 있는 사회라고 역설하였다. 

오딘(Odin)은 느릅나무로 여자를 만들고 물푸레나무로 남자를 만들어 미드가르드(Midgard)에 거주하게 하였다. 오딘은 두 사람에게 생명과 영혼을 넣어주었고, 빌리(Vili)는 이성과 운동을, 그리고 베(Ve)는 감정과 표정을 부여하였다. 여기에서 문제가 야기된 것이다. 오딘은 왜 느릅나무로 여자를 만들고 물푸레나무로 남자를 만들었으며, 왜 빌리와 베에게 나머지 부분을 채워 넣도록 하였을까? 그는 각기 다른 욕망과 다른 생각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산 중턱에 한 그루의 하얀 목련이 피어 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비가역적인 속성을 지녔다. 그것은 일회용을 의미하는 동시에 거룩한 행보를 위한 예정된 희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포도(鋪道)에 물웅덩이가 생기고 그 위로 빗물이 작은 동심원을 그리며 떨어진다. 심연으로부터의 의식이, 또는 의식으로부터의 심연이, 하고 생각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거의 음울하고 냉소적이고 무의식적인 늪에 울리는 불분명한, 알 수 없는 여음(餘音)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끔 인간이라는 항목에 지쳐버린 나를, 또는 그 표상을 발견한다.

기회가 백 명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 해서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비슷한 능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차이는 갈라서기 마련이다. 그것은 세상의 질서가 그렇고, 자연의 섭리가 그렇고, 우주의 법리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어느 누구를 위해, 어느 특정한 시공을 위해 그렇게 작성되어 그렇게 작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랜덤이 무서운 것이며, 그래서 객관이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자연의 질서가 엄정한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 신의 지혜가 시작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교회의 교리를 자신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어 깊은 번민으로 지새웠다. 해안가를 걷고 있다가 작은 남자 아이가 바가지로 바닷물을 떠서 항아리에 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꼬마야, 너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바닷물을 모두 항아리에 담으려고요.”하고 아이가 대답하였고,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한심한 생각에 “너는 저 바닷물을 그 항아리에 다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하고 되물었는데, 아이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저씨 머리에 신의 지혜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라고 왜 바닷물을 이 항아리에 담지 못하겠어요?” 

우리는 언젠가 완벽한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포기해야 한다. 동시에 그러한 단계에 오르려는 욕구의 불가피한 성능에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이해해야 한다. 논증에 의해 확립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논증이 성립될 수 있었던 전제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임이 보증된 상태에서의 출발이거나 묵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모든 질문의 극단에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제가 갖추고 있다고 하는 진리성이란 결국 인간의, 시대의 집단표상이 만들어낸 허상이거나 묵시적 동의에 불과한 것이고, 또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가정(假定)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논증에 의해 확립된 일체의 것은 그것을 규정하는 조건이 무너지는 날 어쩔 수 없이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슬픈 욕망에 묶여 있는 것이다. 진리는 없다. 결국 신념만 있을 뿐이며 그 신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신념인 것이다.

이 칼럼을 읽는 사람 가운데 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미리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내가 체득한 경험을 토대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기술하고 있다. 세계의 질서가 설혹 내가 보는 관점 그대로 집행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젊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삶을 경험하면서 진실이라고 신념하게 된 여러 메모가 있다. 그 가운데 좋은 패가 들어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패가 들어갈 확률이 높다는 항목이 있다. 세상은 분명 랜덤이지만 더 좋은 패가 들어올 것이라는 확신을 지닌 사람에게 랜덤은 어드밴티지를 적용한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간절한 것과는 다른 문제고 노력과도 다른 문제다. 심리적 효과인지 자기최면인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은 분명 자신이 야망하고 자신의 삶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드밴티지를 적용한다. 내가 단언할 수 있는 사항 가운데 세상 어디에도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삶에서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또 충분한 열정을 지녔다. 그런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고, 그런 사람이 더 좋은 패를 받을 자격이 있는 법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고 그 질서에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찾는 것에 만족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세계가 설령 이 세상의 변경할 수 없는 진실이라 하더라도 젊은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긍정하고, 또 자신은 내가 말하는 질서와 규칙에서 벗어난 예외라고 확신하기 바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세상에서 성공하였다고 자부하거나 교만하거나 과시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내가 이해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았고 그들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 해도, 혹은 내가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준다 해도, 하늘과 땅 아래 불가능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 해도 내가 경험한 삶과 내가 진실이라고 신념하는 사항을 그것과 바꿀 수 없다.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으며 그러기에는 내가 지불한 명세(明細)가 너무 깊고, 또한 그런 답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어느 대학에서 최면을 이용해 실험을 했다. 어느 여학생에게 최면을 걸고 특정한 남학생이 그녀의 물건을 훔쳐갔다고 반복하여 주입하였다. 최면에서 깬 여학생은 자신의 물건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자 최면에서 지목된 사람이 물건을 훔쳐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가 훔쳐가지 않았다고 하는 정황이 밝혀진 뒤에도 그의 무죄를 인정하기보다 무죄라고 추정되는 논리를 논리적으로 반박할 뿐 아니라 스스로 여러 정황을 추가해 만들어내기까지 하였다. 나중에 모든 과정을 녹화한 화면을 보여주자 그녀는 자신이 왜 그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러한 논리를 만들어 주장하게 되었는지, 왜 그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했는지 그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했다. 현대의 인지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신뢰했고 유용하게 사용한 이성이나 로고스적 지성은 인간의 감정이 이끄는 바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기반을 제공하는 기능에 불과한 것이라고 밝혀내고 있다. 유전자는 실험실 여학생에게 그러한 것처럼 우리에게 모종의 최면을 걸어둔 것과 같다. 본능은 그러한 최면을 이용해 우리의 행위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항목에 ‘기쁨’이라고 표시해두었다. 유년시절 누군가 우리를 최면에 빠지게 한 다음 어느 사항을 주입하거나 걸어두었다면 우리는 평생 그 최면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누구나 그렇다.

지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조선시대 홍랑이라는 여인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를 여윈 유복자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와 위상을 지니는 것인지 매일같이 암기하며 살았을 것이다. 매일 매일 최면을 거는 것과 같다. 그녀에게 최경창은 아버지의 다른 표상이었으며, 포기할 수 있는 항목이 아니었다. 최경창을 잃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다시 불행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불타는 숯으로 입을 지지고, 자신의 얼굴을 훼손해 흉한 몰골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최경창이었다.

무의식에 그어진 최면은 무서운 것이다. 또한 본능은 엄정한 것이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인간이 본능을 이길 수는 없다. 욕망을 자제하는 것과 본능을 이기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인간의 의지는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희거나 검게 만들 수 없다. 본능은 단 한 순간으로도 인간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손목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내려칠 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의지를 통해 참아내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자체가 본능인 것이다. 

신념이 있다. 인간의 신념은 행위의 의식과 언어의 의식 위에 떠오른 사회적 본능과 같고 문화적 최면과 같다. 그 신념이 타당하고 가치 있으며 올바른 것이라는 양쪽 의식의 동의가 있다면 그를 위해 유전자의 본능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 저거너트를 위해 신상의 바퀴 아래 뛰어드는 인도인을 그래서 본능은 붙잡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신념이 아니라면 저거너트는 사고(事故)에 불과하다. 루터파와 카톨릭은 그래서 서로를 악마 이상으로 증오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역사의 선로 위에서 서로를 윤간하고 살육할 때 그와 같은 악행이 신을 위한 찬양이 되고 영광이 되며 자신의 삶으로 증거할 긍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념 하나 때문이었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후스(Jan Hus 1369-1415)는 불의한 바티칸에 반대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천명하며, “그릇된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선택을 하였다. 1415년 집행된 후스의 화형 현장을 지켜보며 신을 찬미하며 환호하는 민중을 향해 그는 “오 신성한 무지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후스도 민중도, 콘스탄츠 공의회 구성원도 다 같이 그들의 시대에 그들의 신념을 지니고 그들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생성되는 존재는 탄생과 함께 이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프로그램, 또는 모종의 지침을 지니고 태어나는 법이다. 우주의 진공에서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가상입자도 마찬가지며, 모든 시공에 흐르는 에너지 역시 그러하듯, 루시라는 여인이 종(種)의 줄기에서 갈라져 나올 때, 그 종의 행로와 운명에 관한 지침(가능성)은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50만 년 전 일어난 사건 이후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 읽을 수 있는 시스템을 지니고 태어난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기능을 우리는 의식이라 부르고, 그 의식은 하나의 몸에서 두 팔이 나뉜 것처럼 행위의 의식과 언어의 의식으로 나뉜다. 이 두 의식은 같은 뿌리에 서로 섞여 있으면서 다른 친구와 친하고 약간 다른 성향을 지녔다. 선악도 아니고 우열도 아니다. 다만 기능이 그럴 뿐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혹은 불행한 상황에 처한 사람 앞에서, 행복은 스스로 마음먹기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렇게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의식이 설득하더라도 행위의 의식이 무시하면 소용이 없다. 행위의 의식을 속이기 위해 아무리 그럴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식을 속일 수 있는 거짓말은 없다. 한낱 언어로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런 방식의 삶을 사용하지 않았겠는가? 언어로 아무리 설득하고 속이려 해도 행위의 의식이 비웃고 거부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은 그저 언어로 던지는 겉치레이거나 있는 자의 없는 자에게 던지는 동냥이거나 조롱에 불과할 뿐이다. 철봉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두 팔로 잡아야 한다. 한 쪽으로 잡고 있으면 더 힘들고 고될 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지금 그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철봉을 한 손으로 겨우 붙잡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

긍정적인 마음을 먹는다고 긍정적인 삶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의 의식이 그렇다고 인정하고 그런 시퀀스를 실행하며 함께 걸어가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행위의 의식은 말로 하는 그런 언어는 믿지 않는다. 분명한 실천으로 드러난 경우에 신뢰하고, 객관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시그널이나 모티브를 취득할 때 동의한다. 행위로 드러나지 않은 언어는 오히려 더 배척하고 역겨워하며 미워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지녀야 한다고 언어의 의식이 아무리 떠들어도, 언어로 간절하다고 절실하다고 백날 떠들어봐야 소용이 없다. 행위의 의식은 언어의 의식처럼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 실천이 뒤따라야 하고 상황이 지지해야 비로소 긍정적인 마음에 행위의 의식이 동참하는 것이다. 온전한 믿음이 아니면 그 언어는 위선과 같다. 행위의 의식은 본능과 무의식과 감성과 욕망과 베와 더 친하다. 언어의 의식은 빌리와 이성과 현실과 논리와 교과서와 더 친하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고 있다. 항상 어떤 느낌은 있었다. 

행복은 명백하게 우리가 손 쓸 수 없는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에 따라 결정되거나 유보되거나 파괴되거나 복원된다.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와 같이 그래버와 엘리자베스의 행복은 그들이 원한다고, 간절하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복은 전쟁과 무관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행복은 마음먹기에 따라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그들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피한 현실에서 나온다. 그들의 의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는 군인과 그 연인이 처한 현실과 그에 맞는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다. 직장에서 쫓겨난 실직자와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고는 당사자의 삶과 가정을 불행으로 이끌 확률이 높다. 폭락하는 주가는 기업과 투자자의 인생을 실패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러한 사항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결정되는 항목이 아니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의 행복은 인간의 절실하고 강렬하며 오래된 욕망과 대입할 조건의, 현실의, 시대의 여러 항목들에 의해 좌우되며, 이것은 우리가 특정 시공에 거주하는 다수의 유닛 가운데 한 유닛이라는 항목과 연관되어 매우 복잡하고 매우 난해한, 동시에 매우 단순하며 매우 쉬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시대가 불행하면 유닛의 삶 역시 불행할 확률이 높고, 시대가 행복하면 그 지평에 거류하는 사람의 삶 역시 행복할 확률이 높다. 언어의 의식은 행위의 의식을 선도해야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행위의 의식은 고집이 세고, 말이 없고,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며, 기복이 심할 뿐 아니라 아주 오래 전 어느 마법사가 최면까지 걸어 놓았다.

바바리아 수컷 원숭이는 일정한 시기가 되면 자발적으로, 대체로 8년 내지 9년의 성장기가 끝나면 무리를 떠난다. 가족과 함께 성장한 고향을 떠나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알지 못하는 우연을 향해 떠나야 하는 이 수컷들은 그와 같은 사춘기적 충동이 왜 일어나고 왜 떠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본능으로 구체화된 프로그램(근친교배를 통해 생산되는 열등한 종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이 바바리아 원숭이 내면과 신체에 충동을 지시하고, 바바리아 수컷 원숭이는 그 결정을 실행할 뿐이다. 삶의 대부분은 그와 같이 이미 프로그램 되어 있는 어떤 것이고, 그 행로 역시 이미 오래 전에 디자인된 어떤 것이다. 그 프로그램 위에 필연과 우연이 어린 아이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삶은 오래 전부터 이쪽이나 저쪽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였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 자신의 행로를 따라 필연과 우연이 제출하는 시련과 난관의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왔다. 문제를 푼 쪽은 살아남았으며, 풀지 못한 쪽은 사멸했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인간은 바바리아 원숭이와 같다. 또는 북청실잠자리나 검정맵시벌과 같다. 모두 똑같이 그들 앞에 놓인 문제를 그들의 힘으로 풀어온 존재이며, 그런 위상을 지녔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 내에서 부정할 수 없는 명증한 부분인 동시에 우리는 지상에 그들과 동등한 접착제로 부착되어 있는 진화의 생산물이라는 점 또한 명증한 사항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싶어 다니는 게 아니다. 사회가, 문화가, 질서가 그렇게 되어 있고, 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다니는 것이며, 어른은 그들의 질서에 따라 아이를 보육하고 직장에 다니고 나라를 지켜야 하며 특정 정당을 지지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의 자기조직화의 결과에 따라 생겨난 수많은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으며, 유닛은 각각의 톱니바퀴 가운데 어느 톱니바퀴를 담당한다. 어느 톱니바퀴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어느새 다른 톱니바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기능을 수행한다. 사회의 자기조직화는 무서운 것이고 엄정한 것이며, 특정 톱니바퀴가 개인의 목록을 들고 거부할 수 있는 항목이 아니다. 세상은 어느 특정 톱니바퀴가 바꾸고 싶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자기조직화 과정에서 그러한 조건과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 그러한 책무가 지상에 떨어지고 그 책무를 적정한 유닛이 수행하는 노력을 통해 바뀌는 것이다. 

인간의 무한네트워크 성능이 적정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규모에 이르면, 그 단위에 맞는 정보와 재능을 지닌 유닛이 나오기 마련이다. 싯다르타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예수는 그 시대가 그 네트워크 단위에서 다루어야 하는 업무를 담당한 톱니바퀴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뉴턴과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와 다윈과 마르크스와 니체,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 역시 그 시대와 그 단위에서 배태된 톱니바퀴였고, 그들은 다만 그 역할을 수행한 기능이었을 뿐이다. 세상을 읽는 기준과 가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거명하였으되 세상의 각기 다른 항목과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유닛은 무수히 많고, 그들 역시 그들의 시대와 네트워크가 갖추어진 토양에서 생겨난 톱니바퀴였으며, 적정한 기능을 수행한 유닛이었다. 알카포네에게 매수되었던 제이크 잉글이라는 기자는 왜 마피아의 앞잡이 역할을 했느냐는 질문에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 그 일을 대신했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싯다르타가 아니더라도, 뉴턴이 아니더라도, 아인슈타인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대신했을 것이다. 단지 그 단위에서 누가 먼저 손을 들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무한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자기조직화는 네트워크가 적절한 단위에 오르고, 그 단위에 맞는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제출된 업무를 처리할 누군가 적절한 순간 무대에 오르게 된다. 자기조직화는 무서운 것이고 엄정한 것이며,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거역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힘과 방향은 어느 한 유닛이 개인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그런 물결이 아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아무리 위대한 사상을 내놓았다 해도 그 사상이 그 지평에 거류하는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와 같은 행동은 아무 소용없는 미친 짓에 불과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아무리 사악한 테제를 내걸었다 하더라도 그 시대에 거류하는 독일인이 그 테제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히틀러는 일개 가난한 화가의 삶으로 끝났을 것이며, 니체가 중세에 떨어져 그의 철학을 내놓았다면 그는 그 즉시 종교재판에 넘겨져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예수가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해될 수 있고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비로소 그 사상이 위대한 무엇이 되는 것이며, 그래야 베드로와 바울이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고 목이 잘릴 수 있는 명분이 나오는 것일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예수라는 이름 아래 아무 저항 없이 찬송가를 부르며 그 이름을 위하여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사회의 자기조직화 과정에서 무대에 올라 깃발을 휘두른 기수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에게 삶은 저거너트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우리에게 본능과 사회란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통제할 수 없는 힘이고 우리는 그에 압도된 유닛으로, 자발적으로 저거너트에 참여하는 인도인, 혹은 고향을 떠나는 바바리아 원숭이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충실히 충동과 의지를 실현한다. 외국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유전자와 자기조직화에게 필요한 사항이며,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작용하는 필연과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 내면으로부터 작용하는 힘과 사회의 자기조직화로부터 작용하는 힘, 이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근간으로 하는 두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위태롭고 불안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간다. 두 가지 확연하게 다른 줄에 끌려가면서도 유닛은 그래도 자신의 행위에 일체의 사항을 책임진다. 왜 책임져야 하는지 모른다. 그 책임을 부과한 이유도 모르고, 누구에게 물어야 하고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어떤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지 어떤 권리가 가능한지 모른다. 저 앞에 무엇이 있고 저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알려주는 누구도 없고 지시하는 누구도 없다. 다만 두 줄을 붙잡고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할 뿐이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톱니바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또는 특정 분야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혹은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도식과,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도식에 따라 자신의 삶 어느 부분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고, 그 정서가 현실과 시대와 사회의 거대한 바퀴 아래 우리를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누구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런 질문을 할 자격도 없다. 우리는 디자이너가 아닌 유닛이고 톱니바퀴이며, 바바리아 원숭이이고 북청실잠자리이며 검정맵시벌인 동시에 그들과 같은 운명을 지닌 기이하고 불안하며, 그래도 무엇인가 희망하는 슬프고 성실한, 동시에 어떤 의미를 지닌 그런 존재다. 거룩한 행보를 위한 예정된 희생이다.

언제나 바람은 불고, 구름은 달빛에 형체를 드러냈다가 사라진다. 세상은 언제나 그 자리 그 시공에 새로운 논제를 들고 사람들 곁에 서성이기 마련이고, 사람은 그 시공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는 무대에서 퇴장한다. 억울할 것도 없고 슬퍼할 이유도 없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할 것이며, 그와 같은 질서 가운데 생겨나 그 질서 안에서 맡겨진 제 몫을 지불하고 내려오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기억되고 누군가는 잊혀진다. 분명한 것은 위대한 톱니바퀴인 누군가 어딘가에 기표한 그 표시에는 그 기표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저거너트가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 신의 지혜가 시작된다고 하는, 해변에서 바닷물을 항아리에 담고 있던 어느 어린 아이의 무표정한 답뿐이다. sang1475@naver.com

*필자/푸른달빛 방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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