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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김한길을 지지하게 되었는가?

총칙 제1조 2항을 부활시켜,당을 당원들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재관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3/31 [20:26]

나는 어떻게 김한길을 지지하게 되었는가?

총칙 제1조 2항을 부활시켜,당을 당원들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재관 칼럼니스트 | 입력 : 2013/03/31 [20:26]
김한길 의원이 당대표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친노, 비노를 아우르는 탕평정치 하겠다. 김대중, 노무현 지지자들이 하나 되어, 두분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이념이나 구호보다는 국민이 체감하는 민생을 향상시키는 정당을 만들겠다.



당원의 뜻이 가장 존중되는 상향식 민주주의를 하겠다. 민주당 지지자와 진보개혁세력, 부동층과 중간세력까지 포괄하는 대통합을 추진하겠다. 독한 혁신으로 안철수 지지자도 과감히 포옹할 수 있는 더 큰 민주당을 만들겠다.



SNS(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사회소통망) 정당, On-Off(인터넷과 현장조직을 결합한) 네트워크 정당을 추진하여, 국민과 함께하는 정당으로 만들겠다. 이를 통해 시민사회와 노동세력, 청년층 등을 적극적으로 민주당에 유입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더 큰 민주당을 만들겠다.



당원이 주체인 새로운 민주당, 더 큰 민주당의 토대 위에 이기는 민주당을 만들겠다. 힘없고 빽 없고 돈 없는 보통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균등사회를 실현하려면 우리가 이겨야 한다. 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나가겠다.



박근혜 정권의 1) 취임 전 불통 인사 2) 복지-경제민주화 공약 불이행 3) 부정, 부패한 파렴치범들의 전시장이 된 인사청문회로 인해 그들이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다. 우리가 더욱더 혁신하여, 오만과 불통의 정치를 비판, 견제해야 하는 이유이다.



계파를 만들지도 않았고, 어떤 계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계파의 힘에 기댈 수없는 사람이다. 낮은 곳에서 봉사하는 대표가 되겠다. 당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소통하는 당대표가 되겠다. 이상이 당 대표 선언문의 요지이다.



지난 6.9 당 대표 선거 당시, 민주당이 안정적인 당 체제를 갖춰 대선에 필승해야 한다는 구실로 박지원은 원내대표, 이해찬은 당 대표를 맡기로 하고 , 문재인도 이에 동의했다면서 이른바 이-문-박 담합 성공을 이해찬이 공개적으로 밝혔다.



필자는 장문의 글을 써서 이-문-박 담합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나눠 먹기 한 야합으로 규정한 후, 이들의 잘못을 통절히 공격하였다. 그 글의 비판정도가 지나치게 강하여, 민주당의 내분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어 자진 삭제하여 그 글을 다시는 볼 수가 없다.



그 글의 논지를 보자면, ‘이문박 담합은 원내대표 선출권을 갖고 있는 의원들, 당 대표 선출권을 갖고 있는 당원들, 그리고 대통령 후보 선출권을 갖고 있는 당원들과 일반국민의 권리를 침해한 반민주적인 폭거이며, 우리가 결정했으니 따르라는 독재’라는 것이었는데, 결국 이해찬의 계획대로 되었다.



이해찬은 운동권 출신 중에도 과격한 편에 속한다. 현재의 친노(=친문)가 과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노사모는 이렇지 않았다. 노사모는 순수한 열정들이 모여 노무현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어나게 한 자발적 시민단체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 사후 결성된 노무현 재단(전 이사장 한명숙, 문재인, 현 이사장 이병완), 재단법인 광장(위원장 이해찬), 노무현 시민학교 등을 통해 교육된 현재의 친노(=친문)는 분명히 정치 결사체의 일원들이다.



따라서 트위터 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노들 중의 일부도 분명 교육받은 정치단체원들일 것이다. 그들은 항상 시대의 흐름을 선점하고서 이를 정치에 교묘히 이용해 왔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서프라이즈가 그들의 둥지였다. 서프라이즈에서 횡해지던 수많은 언어폭력들이 이제 트위터로 장을 바꿨다.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가 좀 더 순화되었다는 점만을 빼고는 과거 서프라이즈의 노짱토론방이나 트위터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민주당과 이해찬, 문재인, 문성근이 이끌던 ‘혁신과통합’이 결합된 민주통합당이 출범하고 처음 열린 전대에서는 정세균, 486, 이해찬이 지지한 한명숙 후보가 당 대표로 당선되었다. 한명숙 대표는 선명한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게 시종일관 정세균, 486, 이해찬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 ‘패거리끼리 나눠 먹기’ 공천파동을 자초하여, 모두가 승리하리라 예측했던 4.11 총선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피눈물을 흘렸던 민주당 동지들과 그 지지자들은 당연히 반 민주당 세력이 되었고, 결국 2012 대선패배의 원인 중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총선패배에 책임을 지고 한명숙 지도부가 물러났다. 이어 치러진 6.9 전대를 앞두고 이문박 담합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나의 트윗글에 김한길 의원이 댓글을 달았다. "무섭습니다!" 나는 “글을 잘못 썼나?” 하고 깜짝 놀라, "그냥 좀 무섭게 썼습니다."란 글로 답했다. 



그 후 김한길 의원이 6.9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고, 나는 당연히 친 정동영인 김한길 지지 운동을 트위터로 열심히 했다. 김한길 후보가 서울, 경기, 인천을 제외한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자, 당 대표 선거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이해찬 측은 정책 대의원제를 갑자기 들고 나와, 한국노총 2천명, 민주노총 2백명에 친노, 친 이해찬 단체인 국민의 명령 150명, 내가 꿈꾸는 나라 50명 등 2,528명을 임명하였다. 참으로 해괴한 일로서, 결국 정책 대의원들에 의해 당 대표는 결정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잘 조직된 국민의 명령, 노무현 재단 측이 대거 동원한 의혹이 있는 당원과 일반시민들이 참여하는 <모바일 경선>과, <대의원 경선>의 비율이 70% 대 30%로 책정되어, 당의 대표를 뽑는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대표를 뽑는지 알 수 없는 선거였다. 



경선비율이 이렇게 정해진 것은 민주통합당이 출범할 때, 국민참여 정당을 표방하면서, 총칙 제1조 2항 “민주당의 당권은 당원에게 있고 당의 모든 권력은 당원으로부터 나온다”를 삭제한 것과 관련이 깊다.



당원이 정당의 주인 대접을 못 받는다면 그 당원이 어찌 당에 충성을 할 것인가? 4.11 총선과 2012 대선에서 당의 조직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당원을 푸대접한 업보를 받은 셈이다. 이에 김한길 의원은 삭제된 총칙 제1조 2항을 되살려 당을 당원에게 돌려주겠다고 공약을 하고 있다!



당원보다 (새누리당 당원들도 포함된)일반 국민들을 더 중시했던 6.9 당 대표 경선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그렇게 치러졌다. 정책 대의원들과 (새누리당 당원들도 참여한)모바일 투표 결과, 김한길 후보는 대의원,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도 0.5%차로 패하고 말았다. 기가 막힐 일이였다! 당대표 선거는 그렇게 수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났다.



당 대표 선거가 끝난 후, 김한길 의원에게 장난삼아 "제가 고생을 꽤 했는데, 밥 한 끼 사주실래요?"라고 쪽지를 띄웠다. 얼마 지나서 답이 왔다. "한 끼 뿐이겠습니까?" 그리하여 김한길 의원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만남은 독대가 아니라 선거 때 수고해 준 트친들과 함께였다. 아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김 의원을 만나려고 했던 것은 김 의원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김한길 의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2007 중도통합당 창당까지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도대체 중도 통합당이 뭘까?



김 의원은 아주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나의 질문에 응하였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구 민주당과 열린 우리당, 이렇게 호남을 중심으로 야권이 전국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참여정부의 지지율은 밑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런 상황으로 대선을 치루면 필패가 분명했다. 그리하여 김 의원은 구 민주당과의 통합에 찬성하는 의원들을 이끌고 열린 우리당 탈당을 결행한 후 중도 통합당을 창당했다. 오직 구 민주당과의 통합을 위한 수순이었다.



다른 의원들도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으나 쉽지 않은 약속이었다. 6인회동(김한길, 정동영, 손학규, 천정배, 박상천, 정대철)으로 민주당과 완전통합을 하려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중도 통합당은 상처만 남은 실패작이 되었다. 결국 그는 2007 대선패배 책임을 진다면서, 4년 동안의 정치방학을 선언하고 정계를 떠났다.

==> www.hangillo.net/kim_is_02/951



혹자는 김한길 의원이 우리당을 탈당하여, 중도 통합당을 창당한 것을 앞뒤의 상황을 모두 잘라 버리고서, 노무현 대통령을 배신한 행위라고 매도한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임기는 이미 끝나고 있었고, 정권 재창출이 절박한 문제였다.



민주당과 우리당의 통합을 도로 호남당 이라면서 노 대통령이 그 당시에는 반대했지만, 대통합이 정답이었다고 퇴임 후 회고록에서 그 당시의 반대를 후회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명을 거역하고 통합을 추진했던 정동영 2007 대선 후보와 탈당했던 김한길은 그 이후 친노들의 타도 대상이 되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친노들이 반대했던 대통합은 바로 친노들의 손에 의해서 민주통합당으로 완성되었다.



트친들과의 만남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내가 질문을 했고, 김 의원이 성실하게 답했다. 묻지 않은 정치 비화까지 이야기해 주어서 고마웠다! 특히 정몽준과의 단일화과정 이야기는 박진감이 있었다. 아직은 밝히지 못할 부분도 많아 여기 까지만 적는다. <김한길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이숙이)>

==> www.hangillo.net/kim_is_03/619  



그 때까지만 해도 김한길 의원은 나의 관심밖에 있었다. 몇 년 전 서울시당 위원장 선거에서 포효하던 연설과 그 옆에서 보좌하던 최명길씨가 기억에 남는 것이 전부일 정도였다. 유명 여배우를 아내로 두고 있어서인지, 약간 거만한 인상을 풍기는 평범한 정치인.....



하지만 평범한 트친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너무도 겸손하게,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도 숨기지 않고(?) 조용, 조용히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모습이 나를 감동시켰다. 김한길에겐 정치인이 아닌, 뭔가 사람 냄새가 났다.



말하는 태도가 겸손했고, 애써 자세히 설명하려는 태도에서 성실감이 묻어 났다. 그 날 이후, 나는 김한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나는 다시 만나기로 결심했다. 만남은 예상보다 쉬이 이루어졌다.



국회에서 모 의원과 약속을 끝내고, 벤취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김한길 의원에게 전화나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했더니 비서관이 바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래서 또 짧은 만남이 이루어졌다. 몇 가지를 묻고 그가 답했다. 뭔가 아쉬운 만남이었다.



그때, <눈뜨면 없어라>란 책을 선물 받은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복해 보이고, 성공한 정치인으로만 보이는 그에게 그처럼 어두운 과거가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 고생은 장난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고생을 했다. 학비가 없어서 대학을 중퇴해야 했다. 중퇴 직후 일어난 5.18 기간 동안에 정신적 혼란으로 저지른 불장난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한 동안 완전히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했다. 화장지 장사, 계란 장사, 빵 장사, 튀김 장사.....



불장난할 당시 국회의원 비서관 하던 예쁜 애인도 있었는데, 5.18이 나의 정신을 미치게 했다. 그 애인과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쉬워서 5.18이 끝난 직후 금남로 음악다방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만났는데,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5.18은 우리 호남인들의 인생에 그렇게 큰 충격이었다. 가고 싶은 대학을 가지 못하고, 애인도 잃어버린 채, 밑바닥을 전전하면서 매일매일 울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3년을 고생하고 결국 4년 전액면제 장학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나의 소원을 풀었다. 하지만 김한길의 고생에 비하면 나의 과거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생과사의 갈림길을 매일매일 마주하면서 호구지책으로 살아야했던 김한길!



아, 이런 인생도 있구나.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았다. 삶의 무게에 신음했던 나의 과거가 부끄러웠다. 김한길은 그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도 의연함과 인간미를 유지했던 것 같다.(적어도 그 책 속에서는)



그 중에 하나만 들어 보자. 미국에 무일푼으로 가서 고생고생하다, 한국일보 미국지사의 구인기사를 보고 찾아 갔더니, 구인담당자가 그의 이력서를 보고, “사진식자 하는 일을 시킬 수 없다. 글을 쓰는 일자리를 주겠다”며, 딱지를 놓았다. "따로 연락을 드리지요!" 그는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절망감에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한다.



애초에 연락이 오리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한다. "허, 일자리를 이렇게 잃어버렸구나!"하는 심정이었다 한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한국일보에서 기자 채용 문제로 연락이 왔고, 면접 날짜와 시간을 정해 주었다. 그 면접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한, 지옥에서 일거에 천국으로 오르는 귀한 면접이었다.



LA에서 샌 프란시스코 까지 가는 구직여행에 함께 가자고 보채는 아내의 비행기 요금을 아끼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했다. 도중에 이름난 벚나무숲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 주기로 약속도 했다. 하지만 그 벚꽃을 구경하게 되면 1시간 정도 우회해야 하며, 그리하면 그 귀중한 약속 시간에 늦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한길은 아내의 소원을 들어 주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도대체 김한길이란 인간의 머리 구조가 어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그 지옥과도 같은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멍청한 건지, 창자가 늘어졌는지, 아내가 소원하는 벚꽃구경을 시켜주기 위해 1시간을 허비하고서 결국 면접 약속을 놓치고 말다니?? "허, 참, 묘한 사람이다!" 



다행히 다음 날 면접을 허락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기자 자리를 놓칠 수도 있었다! 아니 나 같았으면 아내와 이혼하는 일이 있더라도 벚꽃구경 같은 것을 시켜주진 않았을 것이다. 아예 면접 보는데 데려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텍도 없다!!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인간 김한길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그걸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표현이 정확할까? 그 책을 읽고 나서 본격적으로 김한길을 만나고 싶어졌다.



약 한 시간의 약속 시간을 내어 달라고 부탁한 후에 그를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이제는 질문지를 작성해 가지고 갔다. 궁금한 점을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그는 싫은 내색도 않고 하나하나 나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김한길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에게 고통을 주기 보다는 즐거움을 줄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지지자가 되기로 작정했다. 김한길에게는 무엇보다도 사람 냄새가 난다. 우리 몸의 근원인 흙냄새가 난다. 밝은 미소 속에 심장을 찌르는 수많은 아픔이 숨어 있다.



김한길 의원을 더 알아보기 위해, 홈피를 방문하였다. 그에 관한 수많은 자료가 게시되어 있었다. 부친 통일사회당 당수 겸 대통령 후보, 고 김철 의사에 대해 그가 직접 쓴 글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정치가문 출신이었던 것이다.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조사 일부이다. “.....김철 동지는 한 세기 가량이나 너무 일찍 태어난 지도자였습니다. 가시밭길을 헤치면서, 상처를 입으면서,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언제나 소탈한 웃음으로 친구들을 맞아주던 김 동지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랬다. 김한길 부친 김철 의사는 그 당시에는 생소한 사회주의 운동을 한 선각자였다. 그가 추구했던 바는 현재 민주개혁 진영에서 모토로 삼고 있는 복지, 경제민주화 노선과 흡사하다. 아들 대에 이르러 과연 그 부친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펼칠 수 있을까?



고 김철 의사는 71년 2월, <국민에게 드림〉이라는 대선후보 정견발표에서 종전협정 체결, 군비 축소,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의 긴장완화 정책을 통한 '비동맹·중립화 통일'이라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 앞에서 야당표가 갈리는 것을 막고, 김대중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게로 전 민주세력의 표를 몰아주기 위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중에 당시 대통령이던 YS에게 영입 제의를 받게 되었을 때, “지금 이 당에는 우리 아버지를 감옥 보내고, 잡아다 고문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어떻게 여기서 정치를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DJ를 택했다.



YS로부터 직접 영입제의를 받았으면서도 여당이 아닌 야당을 택한 사람은 김한길이 유일하다고 한다. 그 당시 TV에 여당의 공천예정자로 방영된 것은 방송사의 예측기사로서 전혀 사실과 다르다.



동아일보의 부탁을 받고 쓴 글==>"아버지는 내게 영원한 他人(타인)이었다"(김한길).....너무나 성실하게 자기 갈 길을 가는 한 거인을, 결코 좌절할 줄 모르는 한 영웅을..... ==> www.hangillo.net/kim_is_05/432



 '이혼 후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수중에는 달랑 50 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 전부였다.'고 한다.(조영남)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삼층 짜리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던데 그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몽땅 전처에게 주었을 것 같다.==>음지를 양지로 바꾸는...(유인경)  www.hangillo.net/kim_is_03/627



 내가 본 김한길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워낙 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돈을 무척 아껴 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영혼이 흔들릴 정도의 수준은 이미 넘어선 듯 보였다.



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정치를 위한 정치, 권력을 위한 권력추구가 아니라, 뭔가 보람 있는 일, 후세에게 남겨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 정치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김한길을 신뢰한다!



귀국 후에 그는 참으로 바쁘게 살았다. 15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가며 살았다 한다. 이혼의 상처를 일로 잊기 위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초인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최명길씨와의 연애 이야기   www.hangillo.net/kim_is_04/444



 김한길에게 최명길과의 만남은 새로운 탄생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너무나 바빠 만나서 연애하는 대신 전화로 데이트를 했는데, 전화하다 잠드는 경우까지 있었다 한다. 잉꼬부부의 사랑이 영원하길 기원한다!



가화만사성이라 했던가. "...싸워본 지가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닭살이겠어.", 김한길은 사랑하는 아내 최명길과의 사이에서 어진과 무진을 낳았는데, 그들과 함께 알콩달콩 잘살고 있다.



이러한 김한길이 민주당 대표에 도전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격 있는 게 아닌가? 극한의 밑바닥 인생을 겪었기 때문에 서민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김한길, 어려서 부터 사회 민주주의 운동을 한 아버지, 고 김철 통일사회당 당수 겸 대통령 후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알게 모르게 아버지에게 훈화되었을 김한길,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일등공신인 선거전문가 김한길, 사랑도 진하게 했고, 가정도 화목한 김한길!



그 김한길이 <당을 당원에게 돌려주겠다! 좌우 이념을 떠나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민생경제를 추구하겠다! 더 큰 민주당을 만들겠다! 친노, 비노 가리지 않고 대탕평, 대통합의 정치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 걸었는데, 그의 진정성을 이만하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정말 희한한 인생을 살아온 김한길 의원을 앞으로 쭈욱 지켜보려고 한다. 그가 어디까지 가는지를 지켜보며 사는 것도 세상사는 재미일 듯싶다. '인간은 우주의 먼지'라는 안철수 원장의 말에 공감한다. 우주의 먼지, 김한길 의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지켜보자!


함께 살아가는 중프라이즈(  www.joongprise.com ) 복지세상 배상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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