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계 계파갈등 히스토리 - 3] 미완의 결합으로 그친 ‘민주통합당’국민기대 저버린 계파갈등…“선거필패 급행열차?”2011년 4월26일 있었던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최대 승부처로 꼽힌 경기 분당을에서 손학규 대표가 출마해 당선되면서 향후 정권교체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10월26일 하반기 재보선에서는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밀려서 제1야당이 서울시장 후보도 못내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이는 유권자들이 지리멸렬한 민주당을 뽑아주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편집자 주>
불안했던 통합…대중적 인기 높은 친노 중심체제 옛 민주당계 공천 탈락으로 갈등…총선에서 패배 대선 앞두고 시끄러운 대표경선으로 논란 자초해 혁신 놓고 ‘친노·비노’간 격렬 논쟁…대선도 패배 [주간현대=김범준 기자] 2011년부터 이어진 각종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독자로는 정권교체가 어렵다라는 것이 판명되면서 2010년 지방선거 이후로 분출된 야권 대통합 논의가 박원순 서울시장을 배출한 2011년 10월26일 재보궐선거 이후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는 ‘나는 꼼수다’의 열풍으로 진보적 정치 어젠다가 사회적 공감대를 얻어가면서 ‘시민 참여형 정당’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불안했던 통합 2011년 11월3일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가 2012년에 치러질 총선과 대선의 승리를 위해서 민주 진보 세력을 통합한 민주진보통합정당이라는 정당을 연내에 창당하자는 발언이 계기로 민주진보진영 연석회의가 열렸다. 당초에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이나 국민참여당도 포함한 광범위한 세력 결집을 목표로 했지만, 민주노동당은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던 국민참여당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 때문에 통합은 민주당, 혁신과 통합, 한국노총과 진보 시민단체에 의해 추진됐다. 또한 혁신과 통합 단체는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맡은 정치인 친노세력을 중심으로 9월에 결성된 야당통합 추진기구의 명칭으로 상임대표로 문재인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해찬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김두관 경상남도 지사 등이 대표로 취임했다. 같은 해 11월20일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 한국노총, 시민사회단체가 참가한 회의에서 12월17일까지 통합 정당을 출범시키는 것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그리고 12월7일 민주당과 시민통합당(혁신과 통합을 주축으로 진보통합 시민회의 등이 결성한 정당)의 지도부는 통합 정당의 약칭을 민주당으로 정하는 등 통합 방식에 최종 합의했다. 최종 합의로 당 지도부는 대의원과 당원, 시민으로 구성되는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방식으로 하고, 투표 반영 비율은 대의원 투표결과 30%, 당원 시민 선거인단 투표결과 70%로 정해졌다. 최종 합의를 이룬 민주당은 12월11일에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시민통합당과 합당, 한국노총 및 시민사회단체 등 통합안을 찬성 다수로 가결했다. 통합안 가결을 통과시킨 민주당은 12월12일부터 시민통합당, 한국노총과 통합 회의를 실시하여 당명이나 강령, 당규·당헌의 제정, 지도부 선출 방법 등 막바지 협의를 진행했다. 당명 결정을 위해 민주당, 통합민주당, 시민민주당 3개 후보를 놓고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통합민주당과 시민민주당이 비슷하게 나오자 민주당 측에서는 시민민주당은 시민(市民)은 군 지역 사람들은 배제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며 통합민주당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시민민주당 측에서는 반발하였다. 결국 통합과 민주의 어순을 변경한 민주통합당으로 선관위에 등록했다. 지도부는 30%의 대위원과 70%의 당원, 일반시민들이 참여하는 경선을 통해 총 6명을 선출하며 4명의 지명직 최고위원, 1명의 당연직 최고위원으로 총 11명의 집단 지도체제로 구성할 것을 천명했다. 2012년 1월9~13일 시민 53만894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모바일·지역현장 투표와 2012년 1월 15일 대의원 투표를 통해 한명숙이 24.05%(25만2986표)를 얻어 당 대표에 선출됐다. 문성근, 박영선, 박지원, 이인영, 김부겸도 최고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2012년 2월20일, 민주통합당은 상징색을 노랑으로 결정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초록은 보조색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처럼 지지자들의 큰 기대로 태어난 민주통합당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다양한 단체와 합치긴 했어도 기본적인 다수 세력과 시민들의 지지는 ‘친노무현’ 계열에 쏠려 있었다. 즉, 당내서 기존 당원들이 지지하는 정치세력과 국민투표를 한 시민들이 생각하는 세력은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크게 보면 대중적인 인기에서 앞서는 친노세력과 당내 입지가 탄탄했던 비노세력의 갈등은 언제나 잠재돼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시민들의 지지로 전당대회 1, 2위에 안착했던 한명숙·문성근은 모두 친노세력이었고, 이외에는 비노세력이었다. 결국 태생자체가 불안전한 ‘통합’이었기 때문에 계파갈등의 불씨는 점차 커져갔다. 당초 민주통합당은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공언하면서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후보자는 오픈프라이머리로 선출한다고 밝혔다. 이런 공언으로 민주통합당은 전당대회 이후 한명숙 대표체제가 출범하면서 정당 지지율이 한나라당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계파갈등=총선패배 그러나 한명숙 대표체제는 임종석 전 의원을 사무총장으로 임명하면서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임 전 의원의 경우, 보좌관이 저축은행 비리사건에 연루되어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된 상황이었던지라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임종석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으나 여론이 나빠지고, 당 지지율은 서서히 하강곡선을 타기 시작했다.(하지만 총선이 끝난 후 벌어진 재판에서 임종석은 무죄판결을 받음) 이후 본격적으로 19대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천심사를 시작했다. 수도권의 현역의원 전원이 탈락없이 공천을 받았으며 일부는 단수공천자로 선정되었다. 또한 새누리당 현역의원이 있는 지역구의 경우에는 17대 열린우리당 시절의 전직의원들을 대거 공천하였다. 이른바 친노 486들은 무혈입성한 반면,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계열의 옛 민주당계는 경선 대상으로 지정되거나 아예 탈락하면서 뿔이 난 옛 민주당계 후보들이 탈당해 ‘민주동우회’를 구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민주통합당이 선거혁명이라면서 자랑하던 국민경선과 모바일 투표도 허점이 발견되었다. 대표 경선이야 전국적인 이슈라서 국민경선인단이나 모바일 투표인단들이 많았지만 지역구별로 상황이 다른 판국에 일괄적으로 국민선거인단이나 모바일 투표인단을 모집하게 되면 자칫 조직 동원으로 점철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한명숙 대표는 ‘국민의 열망’이라는 이유로 국민경선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려는 현실이 됐다.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국민경선인단을 모집하던 전직 동장이 선관위에 발각되자 투신자살하는 사태로 모바일 투표에 대한 회의적인 지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새누리당이 박근혜의 친이계 학살이다 뭐니 해도 어찌되었건 문제 있던 현역의원들을 다수 날리는 상황에 민주통합당은 현역의원 탈락은 없고 전직 열린우리당 의원들만 줄줄이 공천한다는 비난에 시달리자 결국 여론을 만회하기 위해 호남권 의원들을 대부분 날려버리는 물갈이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형평성의 문제로 탈락된 호남권 의원들의 탈당만 불러왔다. 여기에 한국노총 측에서는 자신들의 후보를 공천하지 않는다면서 이탈 운운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옛 혁신과 통합 측에서도 시민사회 출신 신진인사들이 국민경선도 못 치르고 줄줄이 나가떨어지자 이해찬 전 총리가 탈당까지 운운하는 등 말 그대로 혼란의 극치인 상황이 돼버렸다. 게다가 필수사항이 된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도 서로의 입장차로 협상이 파토 위기에 처하는 등 상황이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런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애당초 민주통합당이 단일 세력이 아니라 여러 세력들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즉, 계파갈등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한명숙 대표는 유력 대선주자가 아니라 유력 대선주자들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일종의 CEO형식의 대표인 탓에 당연히 당 장악력이 약할 수 밖에 없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친노 486들을 중용하고 공천에서 우대한 것이 화를 불렀다는 지적이 많다. 국민들이 새로운 정치를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가졌다면 그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것같이 포장이라도 잘해야 할 텐데 그마저도 못하면서 결국 민주통합당의 지지율이 다시 새누리당에게 추월당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게다가 호남권 의원들은 날리면서 논란이 된 김진표 원내대표 등은 그대로 공천하는 등 과연 공천에 기준이 있긴 했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친노+호남 VS 비노 이 같은 아수라장을 겪은 후 치른 19대 총선 결과 새누리당은 152석으로 과반+1석이라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대로 민주통합당은 그 좋던 분위기를 다 까먹고 127석이란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이런 총선 패배에 대해서 여러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결국 리더십이나 컨트롤타워의 부재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새누리당은 박근혜 위원장 중심으로 공천 탈락자들을 달래가면서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은 각각 지분을 가진 거물급 정치인들이 선거위원장들을 맡았지만 자기 지역구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부산 사상에 출마한 유력 대선후보 문재인 고문도 부산 경남권 이외에는 커버를 못했을 정도였다. 한명숙 대표가 이런 약점을 커버했다면 몰라도 공천실패로 이미지가 추락한 한 대표로선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게 큰 문제였다. 이에 4월13일, 한명숙 대표는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 사퇴를 밝혔다. 한명숙 대표 사퇴 이후 지도부는 2위 최고위원인 문성근 최고위원이 대표대행으로 이끌다 5월4일 선출되는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6월9일 임시 전당대회까지 이끌고 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문제는 한명숙 대표 이후의 당권 경쟁에도 가속도가 붙은 상황으로 당내 중진이자 친노인 이해찬 의원이나 정세균 의원이 거론됐으며 비노 쪽으로는 박지원 의원이 거론됐다. 탈계파적인 인물로는 김한길 의원 등이 거론됐다. 그러나 이 같은 당권을 향한 계파 간의 경쟁으로 국민들은 물론 지지층들의 시선은 싸늘해져갔다. 결국 총선패배 이후 언론에서는 당권경쟁만 부각시키면서 민주당의 미래는 불안하기만 했다. 이처럼 원내대표 경선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던 중 4월26일, 친노 중진인 이해찬 전 총리와 호남 중진인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만나서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체제로 가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 각 언론에 보도되면서 민주당의 원내대표 경선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이는 ‘친노 이해찬’과 ‘비노 김한길’의 대결구도가 격화되면 대권에 가기도전에 당이 망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나온 결과였다. 하지만 원내대표 경선을 준비하던 다른 계파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여기에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문재인 고문까지 이 합의에 팔을 걷어붙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커져만 갔다. 합의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사실상 문재인·이해찬을 필두로 한 친노 주류와 호남세력의 야합이라고 맹비난하는 중이고 문재인 고문이 여기에 끼어듦으로서 사실상 이해찬 대표 체제에서 공정하지 못하게 사실상 문재인 고문을 당의 대선후보로 끌어올리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당내 경선에서 계파끼리 연합하는 건 어느 정당을 불문하고 매우 흔한 일이다. 이해찬·박지원 의원이 경선을 치르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당내 경선에서 합법적으로 서로를 지원하겠다는 것인데 이를 야합이라고 하는 건 그저 반대세력의 정치적 공격에 불과하다는 소리도 컸다. 끊이질 않는 당내갈등 결국 이해찬·김한길 간 박빙의 당 대표 경선은 계파갈등·야합으로 점철되며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후 이해찬 의원이 당대표로 당선됐고, 바로 당은 대선 체제로 돌입했다.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완전국민경선으로 치러진 가운데 선거인단 108만5004명이 신청했다. 대통령 후보 경선 컷오프를 통과한 다섯 후보 중 박준영 후보의 사퇴로 정세균, 김두관, 손학규, 문재인이 출마했다. 문재인 후보는 전국 순회투표에서 13연승을 기록하면서 전승을 거두었고, 누적 득표에서 34만 7183표(56.5%)로 과반을 얻어 결선투표 없이 당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민주통합당은 정권교체를 위해 문재인 후보 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로의 집중도 잠시 안철수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안철수 후보가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단일화의 조건으로 민주당의 정치혁신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민주당 내에서는 혁신과 친노세력의 퇴장을 놓고 또다시 친노·비노 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2012년 11월1일 김한길 최고위원이 지도부 총사퇴론을 제기하며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11월18일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인적쇄신론이 불거지자 이해찬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총사퇴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문재인 대선후보에 당 대표 권한 대행을 맡겼다. 이로 인해 민주통합당의 2기 지도부도 3개월 만에 ‘계파갈등’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같은 분열된 모습으로 대선에서도 결국 ‘박근혜 대세론’을 뒤집지 못하고 문재인 후보는 박빙의 차로 패배해 버렸다. kimstory2@naver.com <무단전재 및 배포금지. 본 기사의 저작권은 <주간현대>에 있습니다.> 원본 기사 보기: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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