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① Again 1997 ‘그때 그 시절’/대한민국 최초 ‘평화적 정권교체’ 스토리초박빙 대권경쟁…“대통령은 하늘이 결정한다”YS 정권 말기 들어 강해지는 野…김대중의 복귀
‘9룡 경선’으로 화제 모았던 신한국당의 ‘경선전’ 이회창 흔든 ‘병풍’…이인제 탈당으로 ‘분열’까지 대선 막판 IMF사태 직격…평화적 정권교체 이룩 <주간현대>가 창간된 1997년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이벤트가 많이 발생한 해였다. 누구나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비극 ‘IMF 외환위기’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경제파탄이 시작돼 재벌들이 줄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한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가 일어나 탑승인원 254명 중 228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고 또한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정립한 황장엽 비서가 망명을 와 다양한 논란거리를 양산했다. 그리고 1997년 말 대미를 장식한 대형 이벤트로는 대한민국 역사 최초의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1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주간현대=김범준 기자] 한국 정치역사에는 수많은 선거가 있었지만 그중 15대 대통령 선거는 21세기 현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선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선거의 의의 자체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여야 간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한 대통령 선거였기 때문이다. 김대중 복귀 영향력 김영삼 정권은 후반기에 들어오면서 19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기록하는 등 실정으로 인해 국민의 신임을 잃어갔고, 반대로 야권의 힘은 강해져갔다. 김영삼의 정치적 라이벌 김대중은 92년 대선 패배 이후 영국으로 유학길에 올랐지만 특유의 투철한 3전4기 정신으로 재무장해 약 2년 7개월 만에 다시금 정계에 복귀한다. 김대중은 복귀 전 치러진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선거판을 뒤흔드는 실력을 과시 하며 입지를 강화했다. 이후 김대중은 남아공의 민권운동가의 넬슨 만델라가 이끌었던 정당인 ‘아프리카 국민회의’에서 이름을 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총재자리에 오른다. 치명타를 입은 김영삼 정권은 와신상담에 나서 당명을 고치고 신한국당을 창당한다. 또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으로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버리면서 지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새정치국민회의는 창당 이후 곧바로 치러진 96년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 본인조차 전국구의원에서 떨어지는 사실상 대참패를 기록하고 만다. 그는 국민회의의 의석수가 14석이 늘었고 여당인 신한국당은 26석이 줄었다고 위안을 했지만 정권 말이었던 김영삼의 신한국당은 여유로웠던 경제를 위시해 무소속의원과 자민련 의원 4명을 끌어모아 결국 과반을 달성하게 된다. 국민회의는 민주당계 야당표의 분열로 서울에서 부진하여 79석에 그치고 거물급 정치인이 낙선했다. 지역구는 물론 비례대표에서 김대중이 한 석 차이로 떨어졌다. 이때 이종찬, 노무현이 출마했던 ‘정치 1번지’ 서울시 종로구를 비롯해 수도권의 30여 개 지역구에서 표 분열로 신한국당이 쉽게 의석을 얻는 어부지리가 속출했다. 공교롭게도 종로구에서는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가 지역구 초선으로 당선되었다. 국민회의는 서울에서만 16석이 뒤집혀 고작 18석을 확보, 서울지역 1당을 여당(27석)에 내주게 되었으며, 100석 확보는 물론 1당 확보를 장담하던 김대중 총재로서는 쓰라린 패배였다. 결국 이 모든 게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병’ 때문이라며 은퇴번복과 분당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실제로 총선 후 민주계 전체 의석은 98~95석에서 94석(79+15)으로 오히려 줄었기 때문이다. 이때 김대중 총재는 유례없는 자화자찬에 들어간다. 소위 ‘허세’가 섞인 억지성 발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위기에 빠진 지지층을 추스르는 데는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 많았다. 당시 김대중 총재는 “이번 선거에서 왜 모든 언론은 국민회의가 패배했다고 보도하는가? 패배가 아니라 약진이란 표현을 쓰라고 언론에 요구하라. 65석이 79석이 됐고 전국 58개 지역에서 3000표 차 이내의 초접전을 벌였는데 이게 민심이 아직 국민회의를 안 떠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인가. (중략) 신한국당이 170석에서 139석으로 준 것이 이긴 것이냐, 국민회의가 65석에서 79석이 된 게 진 것이냐. 뭐가 패배고 승리냐. 이걸 기조로 당 기자실에서 성명을 발표하라”라고 말했다. 또 다른 ‘3김’의 축인 옛 민주자유당에서 탈당한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은 충청도와 함께 TK지역을 공략하여 전국정당으로 홍보했으며, 충청권을 싹쓸이 하고 TK에서도 선전해 50석으로 대약진했다. 13대 총선의 통일민주당을 제외하면 제3정당으로서 최대 의석을 확보한 것으로, 통일민주당은 총 득표상으로는 2당이었고 3당 합당으로 사라진 것을 고려하면 역대 제3당 최대 의석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경우 총선에서 수도권에서 선전했음에도 전두환·노태우 구속의 역풍을 맞고 대구·경북에서 자민련과 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주는 바람에 과반수 확보에 일단 실패했으나, 선거 후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와 과반수를 확보하였다. 하지만 12월의 크리스마스 노동법(비정규직법) ‘날치기’ 파동으로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후 민심이 재벌의 연쇄 부도 등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수준의 경제 위기 예감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신한국당은 지지를 잃고 있었다. 결국 굳건했던 여당의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대선을 앞둔 선거판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흔들리는 대쪽 후보 하지만 ‘3당 합당’으로 이뤄진 신한국당은 그때까지는 견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실질적인 레임덕은 사실상 시작됐으나 여전히 과반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차기 대권을 향한 야당의 고민은 커져만 갔다. 본격적인 대선정국이 시작되자 제1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김대중 총재 말고 다른 인물을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대통령병’이라고 지적받을 정도로 김대중 총재의 이미지는 ‘구세대’의 이미지가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인물이 없는 관계로 김대중이 압도적인 지지율 속에 정대철 예비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1997년 5월)됐다. 반면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에서는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최형우, 김덕룡, 이인제, 이한동, 최병렬, 박찬종 등 9명이 당내경선에 도전했으며, 세간에서는 이들을 9룡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지내면서 1995년 행정구역 개편을 실행하는 등 실력자로 통했던 최형우가 1997년 3월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경선에 나서지 못했고, 김윤환도 “차기 대통령은 TK가 아니어야 한다”고 후보 등록을 포기했다. 대신 민정계 중진인 최병렬과 김종호가 경선 참여 선언을 했다. 경선 과정에서는 후보 줄세우기 등의 논란이 계속되면서 당내 기반이 약했던 박찬종, 이홍구가 경선자격을 중도 반납했고, 김종호도 중도 사퇴해 최종적으로는 6인이 경선을 치렀다. 결국 1997년 7월21일 실시된 결선 경선에서는 이회창과 이인제가 격돌한 끝에 이회창이 선출(1997년 7월)되었다. 이인제가 2위를 기록하며 결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대세를 뒤집지는 못한 것이다. 김윤환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가 단합하여 이회창을 지지한 반면, 민주계는 이인제, 김덕룡, 이수성 지지파로 분열한 것이 이회창 승리의 배경으로 분석되었다. 경제가 흔들리고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 찍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1997년 7월의 지지율 조사에서는 이회창 40.4%, 김대중 26.6%로 오히려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어 이회창의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이회창은 군사정권 당시 판사로 재직하며 군사정권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공정한 판결을 내려 대쪽판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깨끗하고 강직한 이미지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과의 불화는 높은 지지율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1990년 3당합당으로 인해 전체적인 선거판이 보수 쪽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거의 판도를 바꿔놓은 것은 다름 아닌 병풍(병역비리)이었다. 이회창의 두 아들이 모두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된 것이다. 첫째아들의 경우 첫 신체검사에서 몸무게 55kg으로 현역판정을 받았으나 미국 유학 이후 치러진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45kg으로 나오면서 면제 판정을 받았다. 또한, 둘째아들의 경우에도 역시 첫 신체검사에서 몸무게 51kg으로 현역판정을 받았으나 이후의 신체검사에서 41kg이 나와 면제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이회창이 권력을 남용하여 아들의 신체검사 결과를 이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회창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병역비리 여부를 떠나서 군 문제에 민감한 한국인의 정서상 두 아들 모두 군대를 면제받았다는 사실 자체로도 이회창의 대쪽 같은 이미지를 망가뜨리기에 충분하였다. 병역의혹 직후(1997년 8월)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의 지지율은 15%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이회창의 병풍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네거티브 전략이 되었다. 병역비리로 이회창이 홍역을 치르는 것을 보며 즐거워한 사람은 김대중 후보만이 아니었다. 이회창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자, 신한국당 내에서도 이러다가 대선에서 정말 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한 이인제가 이회창의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인제는 1997년 9월4일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대선에 독자 출마한다고 선언한다. 그 후로 김영삼의 최측근이었던 서석재를 포함해 이인제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속속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이같은 이인제의 갑작스런 대통령 출마는 3당합당으로 파이가 커져 있었던 보수표를 이회창과 이인제로 크게 나누게 되어 선거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병풍’과 ‘분열’로 이회창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김대중은 여전히 호남의 정치적 고립이라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대중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은 충청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와의 연합이었다. 김대중은 자신이 당선될 경우 총리 자리는 김종필에게 내어줌과 동시에 내각제 개헌을 통해 총리의 권한을 강화시켜 ‘공동정부’를 운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11월에 후보단일화를 완성하면서 일명 DJP 연합을 완성시킨 것이다. 연합은 김대중의 연고지가 호남+충청지역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야권의 민주투사’와 김대중과 ‘박정희의 후예’ 김종필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3당합당’과 마찬가지로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김대중의 ‘종북 빨갱이’ 이미지를 희석시켜 보수세력에 거부감을 없애는 계기가 됐다. 대선 직격한 IMF 이와 더불어 1997년 임기 말 김영삼 정권은 대한민국의 경제가 속수무책으로 파멸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쏟아졌으며, 대기업들은 줄줄이 부도사태를 내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10% 이하대로 폭락했다. 이에 한동안 여론조사 결과는 김대중 1위, 이인제 2위, 이회창 3위로 나왔으나, 보수 표심이 차차 결집되면서 이회창이 2위로 치고 올라왔다. 이때 나온 말이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로 사실상 적중했다. TV토론에서 이인제는 이 말을 언급하면서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됩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문제를 터트리려 했다. 그러나 14대 대선 비자금 문제도 함께 건드리는 바람에 김영삼 정부는 구속 수사가 불가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거 중립을 고려해 수사를 연기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의 관계는 매우 멀어져서 이회창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탈당을 종용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른다. 그 와중에 외환위기가 터져버리고 대선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1997년 11월21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하면서 여당 심판론이 힘을 얻는다. 이 같은 심상치 않은 상황에 이회창은 김영삼 정부와 거리를 두기 위해 조순의 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게 된다. 첫 평화적 정권교체 그리고 운명의 선거일인 1997년 12월18일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표차 39만여 표, 득표율 1.6%차로 아슬아슬하게 초박빙으로 승리했다. 이는 34년 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15만 표차(1.5%) 다음으로 근소한 차이이며, 5대 대선 투표에 참가한 인구가 15대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최저 득표율 차 당선이다. 이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사상 최초로 1000만 표 이상 득표로 당선됐으나 이회창 후보도 993만 표로 거의 1000만에 근접했다. 민주당계 입장에서는 DJP연합으로 긁어모을 수 있는 표는 다 긁어모은 상태에다 이인제 후보로 인한 보수진영의 대분열이 있었음에도 40만 표 정도의 차이에 그치면서 아슬아슬한 결과였다. 보수 입장에서도 아까운 석패였다. 이 정권교체는 1961년 이후 36년 만의 여야 교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1961년의 정권교체는 5·16 군사정변의 결과였고 1960년의 정권 교체는 전국적인 시위로 사상자까지 나온 4·19 혁명의 결과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로운 정권교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49년, 근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또한 1990년대를 풍미했던 소위 3김시대의 끝물을 장식한 대선으로, 이후의 대선부터는 포스트 3김을 자처하는 새로운 유력 정치인들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김대중은 다음해인 1998년부터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김대중 정권은 먼저 지난날의 갈등을 정리하고, 대화합의 시대를 열겠다는 명분으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시킨다. 이후 IMF 사태가 빠르게 해결되며 대한민국의 경제는 미국의 경제호황과 더불어 빠르게 개선된다.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시킨 김대중은 북한 김정일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영예도 안게 된다. kimstory2@hyundaenews.com 원본 기사 보기: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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