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충격파 재계 2위 ‘대우그룹’도 해체
옛 현대그룹 해체시킨 왕자의 난 흔적만 남아 삼성 국내 1위 도약 발판…신경영 선언 효과 갑작스러운 사정 한파 촉각 곤두세우는 재계 6·25전쟁 이후 고속성장을 거듭해 온 재계. 글로벌 시대를 맞은 지금은 국내 시장에만 머물지 않고, 해외로 그 발을 넓혀가고 있다. 대기업들의 영향력과 관련해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이들이 대한민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히 재계 순위라는 표현을 알 것이다. 현재 삼성 확고부동한 1위를 점하고 있지만, 과거 재계 판도는 변동이 적지 않았다. 재계가 지금의 아성을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기 때문. IMF로 대기업들이 도산하거나 그룹 내부 사정으로 인한 지각변동, 정치적 사안 등으로 재계 판도가 들썩였던 것. 재계를 뒤흔든 결정적 순간을 되짚어봤다. <편집자주> [주간현대=취재/손성은 기자]재계 순위라는 표현이 있다. 공정위가 매년 4월 자본금 5조원 이상의 대기업집단 현황을 발표하는데, 이에 따라 여론은 재계 순위를 매기곤 한다. 현재 재계 순위 부동의 1위는 삼성. 몇 년간 재계 순위 맨 꼭대기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그 뒤를 잇는 것은 현대기아차 등 전통의 강자들이다. 이러한 재계 순위는 확고부동한 것일까. 현재의 재계 지형도를 살펴볼 때 대기업들은 자신만의 아성을 구축한 듯하지만 재계 순위와 판도에는 변동이 잦았다. 서서히 판도 변화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순식간에 순위권 밖으로 이탈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재계 판도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결정적 순간들을 되짚어봤다.
대한민국이 역대 최대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듯 보였지만 속으로 곪아 들어가고 있던 상황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는 매년 300억 달러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의 5배 이상의 막대한 외채가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민들의 금모으기 운동과 정부의 긴축 정책 등으로 인해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막대한 사회·경제적 후유증을 야기했다. IMF 도래 대한민국에 큰 상처를 남긴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 사안이 지목되고 있다. 정부의 인위적 환율 유지, 외국 기업의 치고 빠지기 전략, 부동산 투기 열풍, 기업들의 막무가내식 몸집 불리기 등이 거론된다. 구체적 원인으로 지목되기보단 그 당시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정치 부문의 허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다소 두루뭉술한 원인규명 외에는 명쾌한 해답이 없는 실정이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1997년부터 1999년 외환위기 당시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는 부분이다. 해당 기간 동안 언론보도를 통해 대기업들의 부도 소식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는 당시 재계 지형도를 뒤바꾸어 놓았다. 1997년 당시 재계 순위 14위의 한보그룹, 재계 26위 삼미그룹, 진로그룹, 삼립식품·대농그룹, 한신공영, 재계 4위 기아차, 쌍방울, 해태제과, 뉴코아, 온누리여행사, 고려증권, 한라그룹, 동서증권, 청구그룹 등이 부도를 맞는 등 줄줄이 쓰러졌다. 1998년에도 적지 않은 기업이 부도를 맞았다. 나산그룹, 극동건설, 거평그룹 등이 해체 수순을 밟거나 사실상 해체되기까지 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기업 등이 외환위기의 파장을 피하지 못했고, 그 여파로 수많은 중소기업이 스러져갔다. 특히 외환위기 때 당시 재계 순위 2위였던 대우그룹도 해체되고 말았다. 국내 계열사 수 41개, 연간매출 62조원, 자산 83조원, 자본금 18조원, 해외법인 수 396개. 지난 1998년 해체 전 대우그룹의 경제적 위상을 드러내는 지표다. 이 같은 대우그룹은 창립 직후부터 고속성장을 거듭하면 한때 삼성을 제치고 재계 2위에 오르는 등 큰 족적을 남겼다. 지난 1993년 대우그룹은 향후 그룹 운명의 일대 전환점이 될 ‘세계경영’을 선포하며,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섰다. 당시 대우가 내세웠던 세계경영은 선진업체가 진출하지 않은 공산권 국가 등 개발도상국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겠다는 것. 개발도상국을 선점하기 위해 대우그룹은 현지법인 설립과 인수합병을 통해 단기간에 정착, 사세 확장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이 같은 계획은 개발도상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수월하게 이뤄졌고, 국내 시장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대우자동차는 해외에서 높은 실적을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대우그룹은 해외 시장 본격 공략 선언 당시 150여 개에 불과했던 해외현지법인이 1998년 396개로 급증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기록했다. 이 같은 대우그룹의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고속 성장은 대한민국과 해외 경제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재계 2위 달성은 순간이었다. 결국 대우그룹은 외환위기와 무리한 몸집 불리기로 인한 부작용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 개발도상국에 대한 선제적 공략을 통한 고속성장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부실이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고스란히 드러났고, 이는 부메랑이 돼 대우그룹의 해체로 이어졌다. 현대가 왕자의 난 얼마 전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과 14주기 제사가 있었다. 정 명예회장이 재계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한때 재계 순위 1위의 옛 현대그룹을 설립한 전설적 인물이다. 하지만 이 같은 옛 현대그룹은 정 명예회장 타계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다. 지난 2000년 3월 이른바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당시 옛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정 명예회장의 차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남편 고 정몽헌 회장이 충돌했다. 본래 정 명예회장은 그룹 경영 후계자로 정몽구 회장이 아닌 5남인 정몽헌 회장을 지목하려 했다. 이로 인해 갈등이 빚어졌던 것. 이를 1차 왕자의 난이라 부르며 그해 5월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이 사태로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구 회장, 정몽헌 회장 ‘3자 동반 퇴진’ 선언이 나오기까지 했다. 왕자의 난을 통해 정몽헌 회장은 옛 현대그룹의 모태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전자 등 26개 계열사를 차지했고, 정몽구 회장은 자동차 관련 계열사 10개를 거느리고 그룹에서 계열 분리했다. 6남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 역시 현대중공업그룹을 분리해 나갔고, 옛 현대그룹은 경영 2세대들의 갈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지난 2000년 공정위 자료에 따르면 옛 현대그룹은 35개 계열사에 자산기준 결과 삼성을 제치고 재계 순위 1위를 차지했던 거대그룹이었다. LG반도체와 한화정유, 기아차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키웠던 덕분. 하지만 왕자의 난으로 인해 그룹 외형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여기에 옛 그룹 모태인 현대건설과 현대전자가 잇따라 부도를 맞고 채권단 관리에 들어가기까지 했다. 설상가상 정몽헌 회장이 지난 2003년 8월 대북 송금 관련 검찰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이후 흩어진 현대가 일원들 사이에 현대가의 ‘적통’을 두고 갈등 구도가 연출되는 등 옛 현대그룹의 위상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상황. 그러나 10여 년이 흐른 현재 현대가는 과거에 못지않은 덩치를 자랑하고 있다. 사실상 정 명예회장의 적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정몽구 회장의 현대기아차그룹은 삼성의 뒤를 이어 재계 순위 2위에 랭크돼 있다. 6남 정몽준 전 의원의 현대중공업은 26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순위 7위의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룹의 적통 계열사를 갖고 분리했던 현대그룹 역시 최근 부침을 겪긴 했으나, 그룹 운영 과정에서 현정은 회장이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고 지난 2013년 말 발표한 자구계획안을 성공적으로 이행하며 재계 순위 상위권에 랭크된 상황. KCC 등 범현대가 일원들은 재계 순위권에 랭크되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범현대가의 자산을 아우를 경우 자산 규모는 190조원을 훌쩍 넘기게 된다. 삼성 신경영 선언 현재 국내 재계 순위 1위 삼성. 국내 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삼성이 국내 재계 판도에서 부동의 1위와 함께 세계적 기업으로 밑그림을 그린 시점은 지난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다. 지난 1993년 6월7일 이건희 회장의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라며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이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라는 발언으로 대변되는 신경영 선언. 당시 이 회장은 양보다는 질 위주의 경영으로 전환해야만 국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 변화와 혁신을 요구했던 것이다.
또한 1995년부터 3급 신입사원 공채에서 학력 제한을 철폐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직원들의 대학 졸업장보다 개인의 실력이라는 판단 때문. 아울러 그해 말에는 468명이라는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임원 인사를 시행하면서 30대 부장, 여성인력, 고졸, 장애인, 특수분야 전문인력 등을 과감히 임원으로 발탁해 ‘열린 인사’를 전격 시행하기도 했다. 특히 삼성은 부문별 책임경영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소사장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삼성의 신경영 선언이 현재 삼성이 차지하는 위상의 전부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현재 삼성이 국내 재계에서 차지하는 압도적 위상과 영향력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신경영 선언 이전부터 반도체 분야에서 활약해 온 삼성이지만 신경영 선언 이후 휴대전화 시장에 진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재계 사정한파 광풍 신경영 선언 이전 그 시절 대기업 대다수가 그렇듯 방대한 분야에서 사업을 추진하던 삼성이 ‘선택과 집중’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선택과 집중의 화두는 현재에도 삼성의 경영 키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토대로 삼성이 확고한 재계 순위 1위로 발돋움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최근 재계에 불어닥치고 있는 사정 한파도 재계 판도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완구 국무총리의 부정부패 척결 선언으로 인해 불어닥친 사정 한파. 정부는 공정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며 막무가내식 기업 사정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재계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이번 기업 사정이 재계 판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평가다. 다만 이 같은 기업 사정이 재계와 정부의 미묘한 관계를 방증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과거 대한민국에서 기업이 정치권의 지원을 통해 사업 규모를 확장하고, 몸집을 불려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밀월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고, 일부 정권의 경우 정치권력을 동원해 기업에 대한 군기잡기를 실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는 이러한 상황이 많이 개선됐다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최근의 기업 사정으로 여지없이 깨지고 있는 것. 부정부패 척결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수사이긴 하지만 사정당국의 수사 행보로 인해 재계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기 때문. 여전히 정치적인 힘이 기업의 위에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이 같은 기업 사정 끝이 어디일지는 미지수인 상황이다. 사정당국의 수사 범위를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기 때문. 대대적으로 수사에 착수하거나 여론이 예상치 못한 사안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는 등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같은 기업 사정 수사 범위에 전 정권의 실세들이 연루돼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기업 비리 문제가 아닌 정경 유착 의혹이 제기되며, 수사 범위가 점차 커지는 모양새다. 이미 과거 일부 기업들이 정치권과의 밀월 관계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낸 사례가 있다. 사정당국의 기업 사정 행보가 어디까지 갈지 재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son25@hyundaenws.com 원본 기사 보기: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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