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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말할수 있다,내가겪은 10.27불교법난

10.27법난은 불교계의 긍지로운 과거사가 아니다!

이법철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5/01/11 [14:12]

이젠 말할수 있다,내가겪은 10.27불교법난

10.27법난은 불교계의 긍지로운 과거사가 아니다!

이법철 칼럼니스트 | 입력 : 2015/01/11 [14:12]
1980년 10월27일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소위 “10.27 법난”은, 당시 보안사에 의해 일부 불교계 승려들에 대해 기습적 강제 연행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보안사 요원들의 주도하에 무장 계엄군들은 서울 조계종 총무원을 시작으로 전국 사암(寺庵)에 들이닥쳐 목표의 승려들을 강제 연행했다. 계엄군들은 군화발로 법당과 요사채 방안으로 뛰어들어 수색했다. ‘10, 27의 작전명은 조계종 총무원의 주소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에서 따온 “45계획”이었다. 나는 당시 총무원 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 이법철    

보안사의 위세가 검찰과 경찰을 초월하여 서슬이 퍼런 당시에는 승려를 불법 강제 연행하여 세 가지 방법으로 수사하고 조치했다.
 
첫째, 일부 승려(고운사 주지 등)는 삼청교육대에서 봉체조 등 고통을 받게 했다. 둘째, 일부 승려는 서빙고 등 전국의 보안사 분실에서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전남 등 일부에서는 보안사 분실이 부족하여 헌병대 유치장에 가두고 고문과 구타를 하면서 강제 진술서를 받아냈다. 당시 대흥사 주지는 광주 헌병대 유치장에 쳐 박았다. 셋째, 일부 승려는 총무원 안에서 조사하여 진술서를 받고 강제로 파면조처 했다.
 
나는 세 번째로 분류되어 총무원 안에서 조사를 받았다. 나에 대한 조사대상은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써 온 글들에 집중조사를 하고, 경중을 가려 중하면, 보안사로 압송한다는 위협아래 불교신문사 안에서 두 명의 보안사 요원에 의해 조사를 받았다. 요원들은 나를 책상 앞에 앉히고, 오래된 신문철(新聞綴)을 뒤적이며 내가 쓴 사설과 여시아문(如是我聞), 천수천안(千手千眼) 등 칼럼에 대해 조사했다.
 
보안사에 강제 연행된 승려들과 총무원 안에서 조사를 받는 승려들에게는 보안사로부터 당한 고문과 구타행위와 삼청교육대에서 받은 고통에 대해서 일체 함구한다는 일종의 ‘보안각서’를 제출해야 했다.
 
애초에 보안사에 연행된 적도 없었다는 보안각서였고, 만약 각서를 위반하여 고통받은 사실을 사회에 폭로 한다면, 즉시 보안사에서 다시 연행하여 전에 받은 고통보다 더 몇 배 가혹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세뇌시키듯 강조했다. 따라서 당시 대한민국에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보안사에 불법 연행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한 승려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승려들은 “보안각서”를 제출하고, 굳게 입을 봉한 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한 후유증으로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하나 둘 죽어갔다.
 
보안사 작전명 “45 계획”에 의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난 뒤 제일 먼저 죽은 승려는 낙산사 주지 원철(圓徹)스님이었다.
 
원철스님은 낙산사 주지로 재직하면서 낙산사 주변 군부대에 법회를 자주 열어주고 위문품을 자주 전달한 군부대 지원가 였다. 그런데 군인에 의해 죽어야 했다. 그는 죽기 전, 나를 찾아왔다. 조계사 법당 앞 탑 쪽에 서 있는 원철스님을 본 순간 나는 그의 얼굴에 사색(死色)을 감지했다. 건강했을 때의 얼굴을 아는 필자는 그의 얼굴과 몸이 반쪽같이 허약해졌고, 우렁찬 그의 음성도 사라지고, 음성은 간신히 목안에서 나왔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법철이, 나 곧 죽을 것 같네. 나 죽거든 내가 억울하게 당하고, 죽었다는 것을 글로 써주게.” 그는 보안사에서 겪은 억울한 사연을 얘기 해주었다.
 
원철스님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한 후 병원에 입원했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보안사 지하실에서 군인들의 군화 발에 복부를 가격당한 도선사의 모(某) 스님은 장이 파열되어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불법 강제연행의 승려 가운데는 조계종 전 종정스님과 본사의 조실스님도 예외는 없었다. 전 종정스님, 조실스님도 보안사에 연행되어 가면, 모두 승복을 강제로 벗기고, 계급장 없는 허름한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고문과 구타를 시작한다. 전 종정은 보안사에서 피똥을 싸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고문과 구타를 받고 나면, 조사관 앞에서 조작된 사건에 대한 진술서를 받게 된다.
 
조사관은 진술자가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한 것을 뻔히 알면서 생각해주는 척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적 없지요? 있다면 내게 말하시오.”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고 말하면, 즉시 조사관은 책상 밑에 벨을 울린다. 곧바로 고문, 구타자들이 나타나 다시 지하실로 끌고 가 더 가혹하게 고문과 구타를 한다. 파김치가 되어 다시 조사관 앞에 앉아야 한다. 또 조사관은 질문한다. “이곳에서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적 없지요? 있다면 내게 말하시오.” 진술자는 살아나가려면 조사관이 바라는 대로 진술할 수 밖에 없다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고문과 구타는 없었습니다.” 진술자는 모두 이렇게 대답하고 진술에 응했다.
 
조사관은 “죽으면 한강 속에 던지면 된다.” 협박을 쉬지 않으면서 각본대로 진술을 요구한다.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현장에는 군의관이 나타나 고통 속에 신음하는 피해자의 건강 상황을 살펴 소견을 말하면, 고문과 구타가 잠시 중지 될 수 있고, 고문과 구타가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고문과 구타를 하는 자와 건강상태를 살피는 군의관은 동패였다.
 
당시 10, 27 사건 즉 작전명 “45계획”은 ‘불교정화’라는 미명이었지만, 대한민국 국운이 민주화 시절로 접어들자 ‘45계획“은 ”10.27법난“으로 명칭이 바꿔졌다. 진상조사를 해야 하고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사회를 공감시켰다. 작금에는 정부로부터 ’10.27 법난‘ 피해자에 대한 보상비가 1천 5백억이 책정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그런데 거액의 보상비가 책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정작 10.27법난과 전혀 무관한 자들이 보상비를 전액 ”10.27 법난 기념관“을 짓기 위해 진력한다고 한다. 무슨 속셈인가? 기념관을 지어 자신들이 운영하고, 해마다 정부에 기념관 운영비를 받아 내자는 속셈이 있는 것 아닌가?
 
보상비는 10.27법난 피해자들에게 전액 지급을 해야 옳다. 무슨 기념관을 짓는 명분으로 보상비를 가로채겠다는 것인가?
 
10.27법난은 불교계가 기념관을 세워 기념해야 할 훌륭하고 긍지로운 과거사가 아니다. 10.27법난에 대해 분석해 보면, 일부 추악한 승려들이 조계종의 돈과 감투를 차지하고자 하는 내분, 투서를 당시 국보위와 보안사에 하면서 보안사가 불교정화를 해달라는 음모의 농간질이 기초가 되어 10.27법난의 단초가 되었다. 무슨 독립운동 기념관처럼 기념관을 건립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보상비는 전액 10, 27 법난 피해자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주장한다.
 
10.27법난 당시 보안사령관은 노태우(盧泰愚)였다. 노태우는 어린 시절 부친이 사별한 후 가세가 어려워 모친이 파계사 공양주를 해야 했고, 당시 파계사의 고승인 고송(古松)대사로부터 “태우(泰愚)라는 이름을 받았다.”는 불가에 전해오는 말이 있다. 파계사에서 자라다시피한 노태우가 불은(佛恩)을 망각하고, 보안사령관이 되자마자 보안사를 동원하여 10.27법난으로 한국불교계에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만행이라 지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승려들은 이런 짓을 했다. 조계종의 돈과 감투싸움에 갑(甲)은 을(乙)을 척결해야 한다고 투서, 진정을 했고, 을(乙)은 갑(甲)을 척결대상이라고 투서, 진정을 했고, 병(丙)은 갑을(甲乙) 모두를 척결해야 한다고 투서, 진정을 했다. 투서, 진정서를 받은 국보위와 보안사는 조계종 고승들에게 자문을 구하니 고승들은 갑을병(甲乙丙) 모두를 척결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어찌 보면 조계종 내부의 돈, 감투싸움에 국보위와 보안사가 놀아나고 이용된 사건이 10.27법난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다.
작전명 “45계획”은 종로경찰서 근처의 현대사옥 쪽에 한옥여관으로 유명한 운당여관(雲堂旅館)에서 시작했다. 음모의 큰 방 좌장은 보안사 양모(某) 소령이었고, 측근에는 일부 군법사들이 조계종의 승려를 불법 연행하는 생살부(生殺簿)를 작성했었다.
 
1980년 10월27일 아침 9시 30분경, 나는 조금 늦게 총무원에 출근하는 데 조계사 종각 쪽에 군용버스가 한 대가 주차해 있었다. 버스 안에는 당시 송월주 총무원장을 비롯해서 조계사 주지, 각 부,국장 등이 침울한 얼굴로 좌석에 앉아 차창을 통해 다가오는 나를 보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오판했다. 전날 포항제철소 견학을 간다는 말이 생각나 “왜 나를 배제하고, 자기들만 가는가?” 화를 내면서 버스에 승차를 시도했다. 젊고 예쁜 정장한 아가씨가 손에 무전기를 들고 다가와 나의 신원을 확인하더니 단호히 이렇게 말했다. “내리세요.” 그 버스는 포항제철소가 아닌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가는 직행버스였다.
 
보안사는 자신들이 지지해주는 승려들에게 총무원을 넘겨주었다. 보안사로부터 조계종의 권력을 받은 A스님이 총무원장이 되었고, 그 아래 스님들이 마구잡이로 보안사의 주문에 따라 보안사에 조사받은 승려들에 무차별 중징계를 해버렸다. 훗날 이성철(李性徹) 종정스님이 법규위원회를 통해 중징계 받은 승려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나는 보안사 요원의 요구에 의해 보안사로부터 조사를 받은 적도 없고 보안사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보안각서를 제출했다. 당시는 개떡 같은 시절이었다. 나는 오랜 세월 입을 봉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결론을 짓는다면, 조계종의 돈과 감투 욕심에 같은 승려에 대해 투서, 진정하는 자들, 보안사가 나서 불교정화를 해달라는 일부 고승들의 음모 탓에 10.27법난은 일어났다는 것을 밝힌다.
 
박근혜 정부는 현명한 조치를 해야 한다. 10.27법난 피해자들을 위해 정부가 주는 보상금이 있다면, 나는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주어 한다고 주장한다. 독립운동도 아니고, 무슨 민주화 운동도 아닌 추악하게 조계종의 돈과 감투싸움인 내부 투쟁의 결과물인 10.27법난에 대해 무슨 기념관 건립과 해마다 기념관 운영비를 정부에서 지원하기를 바라는 논의는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국민혈세는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다.
bubchul@hotmail.com
 
*필자/이법철. 스님. 시인. 이법철의 논단 대표. 칼럼니스트.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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