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남한의 경제지원과, 마약과 위폐, 외화벌이, 무기수출, 그리고 각종 범죄행위로 마련한 돈으로 대량살상 무기개발과 대남적화공작을 지원, 김정일-김정은의 통치자금, 김정일 일가의 초호화판 생활비와 유흥비 지출, 그들의 애완견도 프랑스 샴푸를 쓴다.
39호실의 경우 북한의 경제를 파괴하는 무서운 제도적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남한사회에 몇이나 될까. 내각의 국가계획위원회가 나라살림을 위하여 사용하는 예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어마어마한 비자금을 김정일 개인이 마음대로 39호실과 38호실이란 조직을 통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2004년 현재 북한의 구매력기준 (purchasing power parity) GDP는 295억 8천만불로 남한의 8,578억불에 비해 1/30 수준이었고, 2012년 현재는 북한이 400억불이고 남한은 1조 6천 400억불로 북한의 40배 이상이 되었다. 저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인민은 굶주리고 헐벗고 있는데 120만의 군대를 유지하며 대남적화공작과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얼마나 엄청난 돈을 쓰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39호실의 경우는 1970년대 중반에 조직이 되어 형식적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재정경리부 산하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김정일이 직접 그 조직을 장악하고 운영하였다. 당이나 내각이나 국가 어느 기관에서도 손을 못 대는 성역으로 아무도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39호실이 보유하고 있는 비자금의 규모나 연간지출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알기 쉽게 말해서 북한에서 가장 큰 지출은 전쟁준비와 군비유지를 위한 지출이고, 다음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기위해 쓰는 돈이고, 세 번째는 남한을 파괴하기 위한 대남적화공작비이며, 네 번째가 인민경제를 위한 국가운영비라고 하는데, 39호실이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대남공작활동을 중점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39호실은 대성은행과 고려은행을 장악하고 있고, 주로 대성은행에 비밀구좌를 갖고 있으며, 스위스 은행과, 오지리 비엔나에 있는 금별은행과 금별은행을 통하여 마카오, 홍콩, 독일, 일본, 영국 등 세계 유력은행에 자금을 분산 보유하고 있다. 1997년 현재 김정일은 스위스 은행에 약 46억불을 갖고 있다고 어느 고위급 탈북자가 진술을 했으며 그것은 김정일이 운영하는 39호실 비자금의 <빙산일각> 이라고 하였다. 마약밀매와 위조지폐 등 범죄행위를 통한 자금조달 우선 알려진 내용을 말하면 39호실은 대성총국을 운영하며 산하 120여개의 무역회사를 통하여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대성총국이 너무 설치는 바람에 내각 산하 무역성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39호실은 국내에 원평대흥 수산사업소, 문천금강 제련소, 대성 타이어공장 등 100여개의 공장과 기업소를 직영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 내 17개 금광이 39호실에 속해있고 연간 약 12톤의 순도가 높은 순금을 생산하여 해외에 밀수한다. 금 수출은 주로 마카오에 있는 조광무역상사가 처리해 왔으며 홍콩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국제 밀수군 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모든 재외공관과 국내기관이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충성금, 정성품, 외화벌이" 등의 명목으로 김정일에게 바치는 뇌물이 39호실에 들어가며, 이를 위해서 외교관들은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하면서 추잡한 밀수 행위를 하고 국내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인민들이 추가노동으로 버섯재배 산채채취 등으로 "위대한 장군님께" 바치는 충성금을 마련하였다. 재외공관에 나가있는 대사나 외교관들의 근무공과는 39호실에 바치는 외화벌이 액수로 판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밀유지 때문에 인민군 보위사령부 소속 몇 개 연대 병력이 양강도 자강도 산간오지에서 생산하는 아편 (검은 금)과 코케인 (백도라지)과 필로폰 등으로 버는 돈이 39호실에 들어간다. 이를 위해서 식량이 부족한 북한의 처지에 17,000 에이커에 달하는 농경지를 양귀비 재배지로 전환했고 연간 평균 약 50톤의 아편을 생산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요덕 수용소 부근에 수용소 면적 15배의 아편재배 농장을 개간하였다고 한다. 미국의회 조사국 (CRS)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수 십여 년간 북한의 외교관들은 면책특권이 부여된 외교행랑을 이용해 헤로인, 코케인, 필로폰, 아편 등을 밀수했고 15개국에서 최소한 35회 이상 마약밀매에 연루 됐으며 1996년부터 드러난 북한의 "메타암페타민" 수출은 주로 일본 태국 필리핀을 종심으로 하는 아세아권을 겨냥한 것이며 북한은 지금도 연간 10-15톤의 고품질 "메타암페타민"을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상기 미국 의회조사국에 의하면 북한이 마약밀수로 버는 돈은 연간 약 1-2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39호실의 비자금 조성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그 중에 밀수와 마약 외에도 위조달러 유포가 포함된다. 북한은 가장 정교한 위폐 기술을 갖고 있으며 미국의 조폐공사가 사용하고 있는 인쇄기와 비슷한 1,000만 달러짜리 요판 인쇄기로 가짜 달러를 찍어낸다. 북한의 위조달러 유포가 최초로 적발된 곳은 1974년 칠레에서다. 그 후로 적어도 몽고, 독일, 러시아, 마카오, 홍콩 등 9개국에서 적발되었고, 한국정부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연간 유포 액수는 약 1,500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일개 범죄행위로만 볼지 모르지만 미국을 위시한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참으로 심각한 골칫거리다. 39호실 비자금의 용도 이러한 범죄행위를 통하여 조성되는 39호실의 비자금은 과연 어떠한 목적에 사용될까. 중앙에서는 김정일 직속 비서실내에 두개의 전담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하나는 <권영록>을 중심으로 하는 자금관리반이고 또 하나는 <박용무>를 중심으로 하는 물자 조달반이었다. 권영록에 대해선 이미 지상에서 여러 번 언급된바와 같이 그는 주로 해외에 나돌며 오지리 비엔나에 있는 금별은행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는 내각 총리에 호통을 칠 만큼 김정일의 막강한 측근이었으며 39호실 자금의 유통, 환전, 송금, 배정, 지출 등 자금운영의 총책이었며 자본주의사회의 어느 누구 못지않게 자유분방한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었고 김일성과 김정일 가족이 스위스, 스웨덴, 오지리, 러시아, 유고 등 해외에 체류할 때 사용하는 호화주택이나 비밀 아지트의 구입과 운영을 담당하였다. 스위스 은행에 있는 39호실 비자금의 관리는 베른 주재 북한대사가 총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숨은 이해관계 때문에 스위스 정부는 눈에 띄게 스위스 내에 체류하고 있는 김정일의 애첩이나 측근들을 보호하여 서방세계의 눈총을 받기도 하였다. 박용무를 중심으로 하는 물자 조달반은 <다엑심>(Daexim)이란 회사를 운영하며 국내에 아미산 상사, 2월 은빛 달 상사 등 여러 개의 방계회사를 두고 있었으며 로마, 파리, 코펜하겐, 프라하, 부다페스트, 브라티슬라바, 마카오 등 해외에 10여개의 지사와 상주요원들을 두고 김정일과 그의 가족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를 해외에서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박용무는 북한의 외교여권 외에 <Ricardo Pwag>이란 이름으로 브라질과 포르투갈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일본과 미국은 물론 세계각지를 누비고 다니며 소위 <1호 물자> (김정일을 위한 물자)를 조달하였다. 39호실의 비자금은 최우선 순위로 김일성 기념궁 유지비와 김일성과 김정일 가족의 호화생활 유지비에 쓰이며 김정일의 숨겨둔 애첩에 대한 생활비도 물론 39호실 비자금에서 나갔다. 그들이 사용하는 생활용품은 거의 외제이며 심지어 그들의 애완동물까지도 프랑스 샴푸를 사용하였다. 7.8월 삼복중에도 김정일은 유럽각지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었는데 그것을 녹지 않게 평양까지 보내는데 담당일꾼들은 목숨을 걸고 북경에 있는 고려민항총국은 아이스크림 한통을 위해 특별 비행기 편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정일의 소위 기쁨조 파티나 모든 유흥비도 물론 39호실 비자금에서 지출되었다. 그리고 김정일의 체제유지비에 39호실 비자금이 사용되었다. 주체사상과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작업에 관련된 모든 사업에, 중요한 국책 사업에, 선심용 사업에,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를 따르는 측근 관리에 쓰는 돈이 그 돈이었다. 당의 정치국원급 이상 간부와 국방위원회 위원들과 기타 측근들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하며 호화주택과 <머쎄디스 벤스> 차량 2대씩이 배정되었다.
해외동포들이 북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고 생활보조비로 주고 온 돈이, 그리고 남한의 기독교나 기타 종교단체들이 선교목적으로 제공하는 돈이 철저하게 39호실에 흡수된다. 김대중이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하는 조건으로 제공한 4억 5천만 달러가 북한의 대남공작 전초기지의 하나인 마카오 조광무역상사의 구좌를 통하여 39호실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사건이며 김대중/노무현 시절 10년 동안에 북한에 준 돈이 모두 39호실에 들어갔다. 지난 2005년에 김정일의 범죄행위를 차단하기 위하여 마카오의 <뱅코델타 아시아 -BDA>에 예치되어 있는 39호실의 2,500만 달러를 불법자금 세탁혐의로 미국이 제재를 가했을 때 북한은 그 정도의 금액으로도 심각할 정도로 휘청거렸다. 그런 예를 보아도 39호실의 비자금이 북한의 체제유지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의 경제압박을 선제공격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것이다. 38호실의 경우 38호실은 원래 김일성 생존시에 인민생활 향상목적으로, 김경희가 중앙당 경공업부 부장으로 재직시, 김일성의 특별한 배려로 경공업부 산하에 자금활성화를 위화여 조직된 기관이었다. 그러나 김경희는 38호실을 통하여 조성되는 자금을 인민경제를 위하여 활용하지 않았고 김정일 일가의 비자금으로 치부하여 당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꺾지 못 하였다. 그래서 39호실의 비자금은 주로 김정일의 통치자금으로 사용된 반면에 38호실의 비자금은 주로 김정일 일가의 <내탕금>으로 사용되었다. 39호실 계열의 상사들은 주로 외교관계가 있는 나라들을 상대로 교역을 하였고 38호실 계열의 상사들은 주로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들을 상대로 교역을 하였다. 그리고 38호실은 해외에서 식당들을 운영하였고 국내에서는 고려호텔과 외환상점들을 운영 하였으며, 중계무역을 통하여 돈을 벌었다. 그 당시 김경희의 남편 장성택도 38호실 비자금에 상당히 관여 하였고 산하기관에서도 비리가 많이 적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8년에 자금관리 개선조치로 39호실과 38호실이 통합되었다가, 무슨 이유로 2010년 5월에 다시 분리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장성택이 39호실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김정일의 애첩 김옥이 38호실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첩보도 있었다. <삼지창> 경제운영의 모순 북한의 경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없는 특이한 <삼지창> 통제경제 (three-pronged economic practice)를 운영하는 구조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향후 어떠한 경제개혁이나 개방정책을 도입한다하여도 이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한 수렁에 빠져있는 북한의 경제는 구제할 길이 없으며 자연도태 될 것이다. 이 <삼지창> 경제란 이런 것이다. 즉, 국정운영에서 가장 비중이 높아야할 내각담당 제1경제위원회의 <민생경제>는 최하위 우선순위로 떨어져 있고, 1년 (ppp) GDP가 고작 400억불에 불과한 가난한 나라에서 노동당산하 제2경제위원회의 <군수경제>에는 재래식 무기에서 핵무기 개발에 이르기 까지 막대한 전쟁준비자금을 배당하고 있으며, 김일성 김정일 일가를 위한 제3경제위원회의 <수령경제>에 국가자산의 최우선 순위를 두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수령경제>를 조성하는 39호실과 38호실의 비자금운영에서 파생되는 비리와, 암투, 이권경쟁, 배신, 분열, 혼란, 체제불안, 피의 숙청 등, 심지어 믿었던 조카가 고모부에게 온갖 더러운 누명을 씌워 처형하는 비극 까지 발생하였으며, 그 <악순환>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결국 제제모순 때문에 쓰러질 것이다. 장성택의 꿈과 오판 스위스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39호실 비자금은 <베른>에 있는 북한대사 이철 (본명 이수용)이 1987년부터 2010년 까지 장장 23년간 관리해왔다. 2008년 7월에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 이양을 서두르고 있을 때, 이철이 2010년에 평양에 돌아와서 스위스 은행의 39호실 비자금을 후계자 김정은에게 인계하는 과정에서, 분산된 비자금관리의 방만성을 수습하는데 상당한 마찰이 있었고, 전에 노동당 작전부를 지휘한 오극렬 계열에서는 회수가 되었지만, 중앙당의 장성택 계열이 장악한 부분은 완전 회수가 불가능 하였다. 자금관리의 전문성뿐만 아니라 김경희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서운 김정일 시대는 가고 철없는 김정은 통치가 출범하면서 <돈의 냄새>를 더 맡고 싶어 하는 군부와 노동당 일부에서 장성택의 영향력과 비자금관리의 기득권을 시기질투 하면서 칼을 갈고 있었다. 2002년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8박9일간 18명의 북한 경제시찰단이 남한을 다녀갔다. 그때 시찰단에는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박남기가 단장이었고 개혁성향의 장성택과 화학공업상 박봉주가 끼어있었다. 남한의 놀라운 경제발전상을 목격한 그들은 개방경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으나 살기위하여 몸을 사리고 있다가 김정일 시대가 가고 나이어린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하자 서서히 자기들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에, 장성택이 순진하게 자기의 영향력만 믿고, <수령경제>의 비중을 내각중심의 <민생경제>로 이전할 것을 염두에 두고, 박봉주를 내각총리에 앉히면서 가시적으로 체제에 도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위 <연식개혁>을 진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성택은 결정적으로 한 가지를 오판하였다. 북한에서는 <수령절대주의>와 그를 옹위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한 어떠한 형태의 경제개혁도 불가능하며, 경제개혁 그 자체가 체제에 대한 도전인 것을 계산하지 못하였다. 경제개혁은 필연적으로 39호실과 38호실의 비자금으로 조성되는 <수령경제>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내각중심의 경제활동과 외화벌이는 더 활발해지고 39호실과 38호실의 외화벌이는 축소되어야 한다. 장성택이 더 현명하였다면 경제개혁 이전에 체제의 목을 치는 칼을 먼저 뽑았어야 했다. pswoodson@yahoo.com *필자/이명산. 북한 전문가. 시인. 칼럼니스트.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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