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수정치인이었다면 나는 그를 꽤 좋아했을 것이다. 우선 두뇌가 상당히 유두리 있게 회전하는 타입이다. 그리고 인정이 많게 생긴 상이다. 다만, 나는 보수 글쟁이이었으므로 그에게 엄청 듣기 싫은 이야기들을 썼다. 당시 해외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동료들은 나를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나의 칼럼은 브레이크뉴스의 미국 내 자매지인 미주 주간현대에 게재되었지만, 나는 이메일을 통하여 한국 내 수십 명에게 나의 칼럼을 발송하였었고, 그 리스트에는 정당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DJ와 노무현 전 대통령들은 나의 칼럼을 읽고 있었음을 나는 감지하고 있었다. 나의 칼럼 내용에 대한 코멘트들이 이따금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념을 떠나서 평가하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 한국 사회를 민주화, 평등화 시키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그의 성장배경과 성격 덕분이었다. 그는 허물없고 기탄 없었고, 평검사들과 “계급장 떼고” 토론을 하는 등, 대통령으로서 권력의 서민화에 기여를 하였다. 다만, 그는 지나치게 이념에 몰두하였고, 그의 기여는 그래서 좀 뒤죽박죽(mixed bag)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승부사였다. 대선후보 단일화에서 보인 그의 승부사 기질에 국민들은 호감을 가졌고, 포장마차 원샷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정몽준 후보와의 회동에서 노무현 후보는 완승을 거두었고 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그날 밤 장면을 미국에서 재미교포 한국어 방송 텔레비전 뉴스를 통하여 보면서, 그가 대통령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탄핵가결 직 후 나는 나의 칼럼에서, “그만하면 대통령 될 만 하다”고 썼었는데, 그 다음 날 그는 나의 추정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측근에게 “내가 죽어야 총선에서 이긴다”라는 의미의 발언을 하였다고 보도되었다. 그리고는 고의적으로 대통령의 중립의무를 위배하는 발언들을 마구 하였다. 즉, 탄핵을 바란 것으로 추정될 수도 있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당시 한나라당은 정치 감각이 좀 결여된 인사들이 맡고 있었고, 그들은 탄핵표결로 몰아갔다. 나는 칼럼에서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코를 꿴 것이라고 썼다. 이러한 추정에 관하여 노무현 대통령은 부인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당시 나의 추정이 사실일 확률을 95%+로 본다. 상당히 자유형이며 충돌을 사양하지 않던 투사형 노무현 대통령과, 절제의 모범인 박근혜 대통령은 성향과 성격에서 극에서 극으로 다르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의 딸이다. 특권의식이 싹틀 것을 우려하여 자녀들을 청와대에도 처음에는 안 데려가고 신당동 사저에서 외할머니와 기거하도록 하였는데, 참으로 유별난 어머니셨다. 99칸 대부호 집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여성이 그렇게 계급의식이 없이 아무에게나 살갑게 대하고 자식들을 평범하게 키우기 위하여 진력을 한 것은 극히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박통에게 노상 조르는 것도 그만 퇴임하고 신당동 집으로 돌아가자는 소망이었다. 그리고 절제와 절도와 근검이 가정교육의 근간이었다. 육영수 여사는 진실로 특이한 존재였고, 박근혜 대통령의 언행은 어머니의 그러한 가정교육에 의하여 상당히 성형된 것으로 나는 분석한다. 그러한 ‘절도의 공주’ 박근혜 의원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안이 가결되자 만세를 부르는 식으로 들떠있었다. 좀 단순한 성향의 홍사덕 의원 (당시 원내총무였던가?)은 개선장군 같았다. 아뿔싸! 그리고는 한나라당은 천막당사로 당을 이전하고 박근혜 의원은 당대표가 되어 손이 발이 되도록 민초들에게 빌고 다녔다. 그나마 ‘절도의 공주’가 그렇게 자신을 낮추고 용서를 빈 덕분에 한나라당은 완전한 공중분해 신세를 면했다. 민초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 편을 든 것이 전혀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말로 한나라당과 홍사덕 의원 등을 엄청 약을 올리고 그런 것도 안다. 그만 하라고 해도 계속 중립의무를 위배하는 발언을 쏟아낸 것도 안다. 그러나 민초들은 엘리트들과 생각구조가 다르다. 엘리트들은 대부분 혈세로 살아간다. 그리고 뇌물로 살아간다. 쌓아놓은 재산이 많으므로 많은 경우 세세손손 몇 대가 아무 일도 안 하고 바람만 피우며 살아도 괜찮다. 그러므로 따질 것 다 따질 여유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중립 의무 안 지키는 것, 정치가들이 관행으로 정치비자금 쌓아놓은 것,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박근혜 대선후보 돕는 척 하면서 댓글 달은 것 (그리고는 민주당에 밀고하여 박근혜 후보를 낙선시키도록 기획한 것으로 나는 믿지만), 뭐, 이런 사안들을 두고 눈만 뜨면 여야가 싸우고 국회도 닫고, 그런다. 왜? 그래도 혈세에서 봉급이 나오므로. 뇌물도 생기므로. 쌓아놓은 재산도 있으므로. ‘여의도 귀족들’이다. 그러나 서민들은 항상 쫓긴다. 여차하면 다음 달 살 것이 힘들어지고 심지어 막연해 진다. 그러므로, 노무현 대통령이 무슨 잘못을 했다손 치더라도 국정을 극도로 교란시키고 그래서 경제가 흔들리는 것을 참아주지 못한다. 당장 자식들과 다음 달 살 것이 힘든 처지에, ‘여의도 귀족들’이 그런 짓 하면,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를 민초들은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 경제를 흔든 쪽을 역적으로 여긴다. 이 것을 노무현 대통령은 예견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부인했지만, 그 정도 내다볼 수 있는 정치감각이 있으므로 그는 대통령 할만 했다. Enter 서청원 당시 한나라당 고문! 1997년 당시, 나는 한나라당에 그 정도의 정치감각이 있는 인사가 있다는 것을 하늘에 감사했다. “아이고, 이제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것이 뉴스에 보도된 그의 코멘트였다. 그 전날, 한나라당의 이회창 대선후보는 손수 진두지휘 하여 적수 김대중 대선후보를 정치비자금 건으로 검찰에 고발하였다. 상술한 “아이고!” 코멘트가 보도된 그 다음 날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병역사안으로 폭락했다가 겨우 다시 27% 정도로 기어올라갔던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19% 정도로 급락하였다. I told you, I warned you, man! 나는 당시 이회창 대선후보의 비선조직에 속했고, ‘정책자문위원’ 임명장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의 자택 침실 앞에 있는 팩스로 직접 의견을 보낼 수 있는 사람들 중에 속했다. 나는 그가 DJ를 비자금 건으로 고발하면 지지율이 급락하고 대선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하루에 세 번도 팩스를 보내었다. 그러나 그의 대선캠프 내에서는 고발을 하면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주류였다. 나는 극히 외로웠다. 대선 패배 후 그는 나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사과 비슷한 것을 했지만, 나는 이미 한국 정치에 대하여 정나미가 떨어진 후였다. 그 것이 내가 정치판에 뛰어든 첫 경험이었고, 그 후 나는 정치판과 멀리하고 칼럼만 썼다. 내가 다시 정치판에 뛰어든 것은 그 후 근 15년이 지난 후였다. 나는 박근혜 의원이 오래 전에 제안했던 역할을 수용하고 2011년 가을부터 풀타임 비선의 참모로서 박근혜 의원을 도왔다. 이회창 당시 대선후보의 결정은 홍사덕 원내총무의 결정과 동일한 하자가 있었다. 즉, 아무리 잘못한 일도 나라를 흔들고 경제를 흔들 수준이 되면 그 흔든 쪽이 역적이 된다. DJ 비자금 고발은 재벌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는 처지를 초래하며, 경제는 흔들린다. 고로 민초는 그 고발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단순한 논리를 이회창 후보와 그의 캠프는 인식하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기분도 안 될 수준으로 낙담에 빠져있던 나에게 그나만 당시 서청원 고문의 상술한 코멘트는 다소나마 안도의 기분을 들게 하였다. 정치 감각은 정치인에게 필수이다. 이번에 화성에서 대승을 하고 돌아온 그에게 나는 그래서 기대가 크다. 서청원 의원의 대승의 이유도 동일하다. 민주당의 김한길 대표가 무슨 주장을 하여도, 홍사덕, 이회창의 주장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여의도 귀족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안일지 몰라도, 나라를 흔들고 경제에 해가 되는 짓에 대해서는 민초는 철퇴를 가한다. 예외가 없다. 서청원 의원 대승 후에도 궤도를 수정하지 않는 민주당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참패를 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리고, 이회창 당시 후보의 DJ 비자금 고발은 나에게 상당히 난처한 사안이었다. 그 반년 전쯤, 나는 당시 대통령 YS와 당시 이회창 당 대표 사이에 직접 타협의 가교를 마련해 주었으며, 비자금 건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회창 당대표로부터 받아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고흥길 특보가 증인이다. 언론에는 ‘비선의 인사’가 이 타협을 성사시켰다고 보도되었는데 그 비선 인사가 나였다. 그 반대급부로서, 나는 YS로부터 이회창 당 대표에 대한 대선후보 비토의중을 거두어들일 것을 약속 받았다. 그 타협이 성사된 다음 날, 나의 기억으로는 이회창 당 대표는 중국인가를 방문하러 떠났는데, 한국 신문마다 이 타협이 대형 톱기사로 게재되었다. DJ 비자금 고발은 실질적으로 그 약속을 이회창 대선후보가 파기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퇴임 후 신변보장 차 YS에게 약속한 것인데, DJ의 비자금을 수사하면 형평 상 필히 YS의 비자금도 수사하게 될 것이었다. 지지율 추락으로 대선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나는 아우성을 쳤고 이는 사실이었지만, 나에게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모두가 명예를 걸고 약속한 것을 그렇게 깨면 안 되었다. 중간에서 중재한 나는 무참한 심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때 정치라면 정나미가 떨어졌고, 정치에 뛰어들 일은 다시는 없을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2년 전, 안철수가 등장하고 어쩌고 할 때 나는 아주 나쁜 냄새를 맡았다. 나는 글쟁이로서 내 후각을 신뢰한다. 그래서 박근혜 의원의 비선 참모가 되었다. 지난 2년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혈투였다. 지금도 박근혜 대통령은 혈투 중이다. 표심을 바꾸는 데는 효과가 없는 댓글 나부랭이를 빙자하여 대통령으로 인정 안 하겠다면서 ‘박근혜 씨’로 불러대는 정치인들을 보면, 이회창 낙선, 한나라당의 천막당사, 서청원 대승을 거치면서도 민초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아직도 있음에 탄식을 하게 된다. 나라를 흔들고 경제에 해를 주는 경우, 민초들의 눈에는 여야 막론하고 모두 ‘여의도 귀족들’로 보인다. 입에서 신물이 나고 심지어 악이 바치게 만드는 ‘민주주의 신 귀족들’로 민초들에게 인식된다. 내년 지방선거 때나 되어야 민주당이 이를 인식하게 된다면 새누리당에게는 완전 대박이겠지만, 그 때까지 나라가 지금처럼 흔들린다면 정치적으로 지옥이다.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도 대통령으로 인정하기 싫고, 역사적으로 그 정통성을 인정하기 싫다는 인사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러한 심경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다고 그들의 기획에 넘어갈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 않으므로, 완전 평행선이다. 결국 내년 지방선거에서 국민들이, 화성 갑에 이어, 다시 판결을 내릴 때까지 이 굿이 진행될 공산이 크다. sheem_sk@naver.com *필자/심상근. 미 버클리대 박사. 칼럼니스트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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