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교육과정
建實은 거듭 언급하듯이 임시 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 깃수별로 교육과정과 내용이 일정하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건실의 교육기간은 기본적으로 1개월을 기준으로 하였다. 그러나 건실은 개소일과 수료일이 일정치 않았으며, 1개월이라는 기본적인 교육기간 역시도 지켜지지 않았다. 개소일자가 일정하지 않았던것은 당시 정치상황의 변화때문이었다고 사려된다. 특히 '건실'은 1947년 5월, 제 1기 수료후 10월까지 교육이 실시되지 못했다, '건실'은 제 1기가 끝난이후 바로 제 2기 입소생을 모집하는 신문기사를 내 보냈으나, 그 즈음에 일어났던 임시정부 추대계획의 실패와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된후 벌어진 백범과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건실'은 제 2기생을 뽑지 못하고 그 운영을 이어가지 못한것으로 보인다. (2007년 9월, 전한두 7기 교관. 서울 거여동 자택 녹취증언.) 때마침 池靑天의 귀국과 함께 벌어진 청년단체 통합운동(후의 대동청년단.) 역시 건실 1기와 2기 사이 약 6개월간의 공백이 생기게된 이유였다. 지청천은 1947년 4월 이승만과 함께 국내에 들어온 이후, 청년조직의 중요성을 느끼고 우익 청년조직의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이에 백범은 당시 이승만, 김규식과 더불어 지청천의 이러한 통합운동을 지지하려했으나, 지청천이 '大靑'을 별도로 설립하겠다는 성명을 밝히게 되면서 다시한번 자신이 직접 건국을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교육과정에서 많은 굴곡이 있었음은 백범의 남북협상과도 관련이 있었던바, 이후 5.10선거가 백범과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실시되고, 이어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더욱이 정부수립이후 여수,순천 반란사건등 여타 정치사건이 일어나면서 백범의 활동은 계속해서 제약을 받았고, 이로인해 '건실'역시 운영이 여의롭지 못하게 전개되었다 하겠다. 그러나 이렇듯 불안정한 여건 속에서도 '건실'은 다양한 과목을 입소생들에게 가르쳐 각 기수별 교육과목을 살펴보면 정치, 경제, 법률, 역사, 독립운동사등 과목이 망라되었고 백범은 그의 건국구상의 실현을 위해 국사나 국민사상를 강조하였다. 한편, 제식훈련등 군사교육도 강조하였다. 이는 '건국강령'에서도 언급하였던 것으로 중요과목중 하나였다. 제식훈련은 강낙원과 신태영에 의해 진행되었다. 강낙원은 1920년대부터 체육교사와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중이었으며, 신태영은 일본군 육사출신으로 훈련과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330p.) ㅇ. 공산주의 비판 제 5기의 교육과목은 1기의 교육과목보다 그 분야가 좀 더 세분화 되었다. 정치분야에서는 민주주의 해설, 공산주의 비판등과 같은, 당시 상당히 미묘하게 특화된 과목을 통하여 정치의 큰 개념을 떠나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할수있도록 세분화하여 교육시켰다. 특히 주목할것은 '공산주의 비판' 과목이었다. 이 강좌는 金錫吉(조선일보 주필.)이 맡았던 강좌로 이에관한 교육내용은 자신이 직접 집필한 '韓民族의 당면진로'라는 책에서 설명되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강좌에서 제국주의국가들의 투쟁이었던 제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동,서진영의 표면적인 평화가 찿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진정한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계급투쟁 중심의 공산혁명을 지향하는 세력이 있기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독립을 쟁취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할 길은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는 편향적이고 비 현실적인 계급투쟁의 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하여 당시 용기있는 강좌로, 많은 각광을 받았다. (331p.) 결국 현실에 있어서 우리 민족이 당면한 과제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민족단결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어, 이는 백범이 추구하였던 통일정부수립에 대한 의지와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2007년 8월, 鮮于鎭 백범 수행비서. 서울 당산동 자택 녹취 증언.) 이후 8기의 교육과목은 5기의 교육과목에 비해 크게 달라진것은 없었다. 하지만 5기에서는 없었던 특강이 8기에 들어서서는 하나의 교육내용으로서 포함된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특강의 내용은 이를 실시했던 강사들과 연결해 봄으로서 그 내용을 유추할수 있다. 특히 강사들은 제헌국회에서 소장파로 불리우던 김상덕, 김약수, 노일환, 박윤원, 서용길등의 국회의원과 이선근, 이은상, 신정언등의 교육,문학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 특히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남북협상을 지향하고, 반민특위를 통하여 친일파를 제거하자는 백범의 의견과 일치하였다. 특강내용은 백범이 주장하였던 친일파의 처단과 통일정부수립에 대한것이라 할수있을 것이다. (332p.) ㅇ. Epilogue 佛家의 용어에 '時節因緣'이란 法語가 있다. 풀이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因緣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뜻일 게다.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되어 있고, 무진 애를 써 봐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종내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뿐 아니라 사업이나 사물과의 만남도 그러할 것이고, 깨달음과의 만남도 그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만나보고싶은 사람이 있을지라도, 혹은 갖고싶은것이 있을지라도 '시절인연'이 닿지 않으면 바로 곁에 두고서도 만날수 없고 손에 녛을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만나고싶지 않아도, 혹은 갖고싶지 않아도 시절의 때를 만나면 기어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 주어진 운명이 아닐까? 아울러 헤어짐도 마찬가지일 게다. 헤어지는 인연이 딱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리라. 사람이든 재물이든 내품안에, 내손안에서 영원히 머무는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재물때문에 속상해 하거나 인간관계때문에 섭섭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 세상 모든것은 순리대로 흘러간다 하던가..?. 한 직장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종수 사무총장은 한글학자 고루 이극로선생의 종손이다. 그가 보내준 이극로선생의 일대기와, 죽마고우 홍사덕君이 보내준 '백범총서'는 거의 같은 시기에 나에게 전달되었다. 이 두권의 玉書를 밤새워 탐독하던중, 나는 우연히도 공통의 時節因緣을 찿을수가 있었다. 우선 이제까지 우리세대가 몰랐던 국어학자 고루 이극로선생의 한글사랑 일대기였고, 두번째가 白凡을 보좌하던 나의 아버님 金錫吉翁이 당시 왜경의 제 1번표적이었던 언론분야에서 활동하시면서 '조선어 사전' 편찬에 적극 지원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목은 백범께서 아버님을 발탁하게된 주요 골자였기에 더욱 감동이었다. (312p, 비서 선우진 증언.) 세번째 因緣은 아버님 생전에 白凡선생의 '建實'화두때마다 언급하시던 건국大 설립자 張炯이사장과의 일화였었다. 당시 '건실'의 설립초기부터 관여하시던 아버님은 '건실'의 理事로 실무를 담당하였었고, 연배이신 張炯이사장과는 돈독한 사이로 매우 자별하여 동기간처럼 지내셨다 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를지라도 만나게 될 사람은 꼭 만나게 되는가 보다. 이종수총장의 祖父사랑에 못지않게, 그 아버님의 유업을 훌륭히 계승 발전시키고 다방면의 국가 문화 예술분야에 대한 공적과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신 張忠植이사장은 설립자 張炯선생의 아드님이다. 우연한 어느 공식석상에서 이분과 조우하여 함께 하였음도 거의 같은시기였기에 건국초기에 심혈을 기울였던 선구자들의 발자취를 잠시 더듬어 보았다. 끝으로 한글학회 박붕배이사님은 나의 학창시절, 문필을 지도해주시던 은사님이다. 그리고 대쪽같이 살라시며 '竹林'이란 필명을 주신 원로 한글 학자이시다. 우리가 이렇듯 혼조의 와중에서 건강하게 삶의 강물을 무사히 건너올수 있었던것은 因緣이라는 징검다리가 우리앞에 놓여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 이토록 수많은 인연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음에 우리들의 인연은 더더욱 값질것이기에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그시절, 나라사랑과 한글사랑에 몸바친 당대의 선구자 이분들의 영전에 다시한번 감사와 명복을 빌어 올린다. mmm-555@hanmail.net *필자/ 현대차, 기아차, 현대mobis, 임원 역임. 전 현대제철(주) 부회장. 해병대 예비역 대위.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브레이크뉴스 경기북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