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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분단은 역사 방향의 역행" 설파해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 양성한 국어학자

박용규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7/15 [09:16]

이희승 "분단은 역사 방향의 역행" 설파해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 양성한 국어학자

박용규 칼럼니스트 | 입력 : 2013/07/15 [09:16]
이희승(1896∼1989)은 호가 일석(一石)으로, 해방 이후 국립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한 국어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필자는 이희승의 업적을 일제강점기에 전개한 그의 언어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조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희승 선생의 모습     ©브레이크뉴스
    
 이희승은 1896년 6월 9일에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현 의왕시 포일동) 양지말에서 태어났다. 5세 때에 상경하였으나, 7세 때에 누대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개풍군 임하면 상조강리로 낙향하였다. 그의 고향인 개풍군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의 군에 소속되어 있다. 그도 이산가족이었다. 생사를 모르는 아우가 그곳에 남아 있었다.

1910년 경성고보에 편입학하였다. 이 학교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라는 일본인 교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고향의 일가인 이한룡으로부터 주시경의 <소리갈>을 빌려 읽고 국어를 연구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처럼 주시경의 저술을 통해 사숙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부터 민족의식을 가졌고, 조선역사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조선통치에 대한 불만을 가졌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한 뒤, 같은 해 4월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및조선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다카하시와 오구라로부터 문학과 어학을 공부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재학시절부터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였다.
 
언어독립운동에 참여
 
1930년 4월에 조선어연구회 정회원으로 입회하였다. 다카하시의 주선으로 경성사범학교의 교유가 되었다. 1930년 11월경에 이극로의 권유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회원이 되었고, 1931년 1월 6일에 편찬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0년 12월 13일 조선어연구회의 총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 하였는데, 그도 12인의 제정위원 가운데 한 분으로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1년 1월 24일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외래어표기법 통일문제협의회를 조직하였을 때, 그도 이극로, 정인섭과 함께 책임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희승은 4대(1934-1935)와 5대(1935-36) 조선어학회의 간사장을, 6대(1936-37)와 7대(1937-1938) 조선어학회의 간사를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차 토의와 2차 토의에 참여하였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날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책자로 간행하였다.

그는 1938년 1월부터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한글>52)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1940년 4월(<한글>76)까지 총 20회를 게재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우리 민족에게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어떻게 해서든 보급하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를 이 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뒷날 1946년 11월에 이 글이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이희승 저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박문출판사, 1953)  ©브레이크뉴스
 
아울러 이희승은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의 제1독회에서 제3독회까지 모두 참여하였다. 일제는 1935년에서 1936년에 걸쳐 조선말 표준어 사정을 위해 열린 제1독회 장소인 온양과 제2독회 장소인 우이동과 제3독회 장소인 인천 회의에 대해 감시하였다.

1936년 7월 제3독회를 마친 뒤, 조선어학회 내의 표준어사정위원회는 미진한 부분을 다루고자 제3독회의 속회를 열 장소를 다시 물색하였는데, 그때도 표준어 사정위원인 이숙종이 제공하였다. 1936년 이숙종이 세운 성신여학교의 기숙사인 금화료(錦華寮)에서 조선어학회의 간부들이 회의를 대낮에 진행하고 있는데, 5-6명의 경기 경찰부 소속의 일본인 고등계 형사대가 기숙사 담을 넘어 침범하여 회의의 내용을 알고자 하였다.
일제 경찰은 ‘도대체 무슨 회의를 하느냐. 왜 집회 허가도 없이 모였느냐’고 추궁하며 조선어학회 간사 이희승더러 ‘내일까지 본정(本町) 경찰서로 출두하라’고 말하며 철수한 일이 있었다. 이희승은 다음 날 본정 경찰서 고등계에 가서 시말서를 작성하고 이 무허가 집회를 마무리를 지었다.(이희승, 「운정 선생에게서 받은 깊은 인상」, <한줄기 빛을 바라>, 1984) 이처럼 이희승도 일제 경찰로부터 곤욕을 당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조선어학회는 1936년 한글날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고, 이를 책자로 발간하였다. 이상과 같이 일제강점기에 이희승은 민족어 규범 수립 운동에 기여하였다.
 
일제의 탄압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을 문화적 민족운동이고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민족독립운동의 점진형태로 규정하여, 조선어학회 관련자를 검거하여 탄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942년에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이희승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같은 해 10월 1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함남의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에서 수감되었다. 죄수번호 646번이었다.

1944년 9월 30일 나까노 예심판사는 이희승에게 개정치안유지법의 제1조의 결사 조직죄를 적용하여 공판에 회부하였다. 일제는 예심종결문에서 그가 이극로, 최현배, 신명균, 이윤재 등과 조선 독립의 목적을 가진 조선어학회라는 결사를 조직한 점, 한글철자법 통일안과 표준어 사정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과 한글강습회와 한글반포 기념식에 참여한 점과 기관지 <한글>발행에 협의한 점과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업무를 인계 받는 문제에 협의한 점과 이극로의 조직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 찬동한 점과 조선어사전에 사용할 문법술어에 대해 최현배· 정인승과 협의한 점 등이 조선어학회의 목적 실현을 위한 행위를 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의 재판부(니시다(西田勝吳) 판사)는 예심종결에 의거하여 이희승에게 징역 2년 6개월형을 언도하였다. 해방 뒤에야 석방되었다.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국어학자로서의 활발한 활동
 
해방 뒤에도 조선어학회 재건에 참여하였다. 13대(1945, 8, 26-1946, 2.3) 조선어학회의 간사를, 14대(1946.2. 4-1946, 9.8)와 15대(46, 9,9-49, 9, 25) 조선어학회의 이사를 맡았다. 1945년 12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에 취임하였다. 1946년 10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7년 <조선어학논고>를 발행하였다.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9년 10월 한글학회로 개명된 뒤, 한글학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1953년 한글학회 감사에 재선임되었다. 1955년 3월 한글학회 이사에 다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국어학개설>을 발간하였다. 1958년 12월 중고등학교에서 학교문법 용어를 ‘한자어’ 용어로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1956년 5월 7일부터 국어사전 편찬에 착수하여, 100여 명의 인원의 협력을 얻어 6년이 걸려 1961년 12월 28일 <국어대사전>을 편저하여 발행하였다.(「초판 머리말」, <국어대사전>, 민중서림, 1982, 5쪽.)

한편 이희승은 조선어학회의 중심인물이면서도, 우리나라 국민의 문자생활에서 한글 전용을 주장한 학회의 주장과 달리 국한문혼용을 내세웠다.

그는 1969년 7월 31일에 창립한 한국어문교육연구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학술단체는 모든 교과서에서 한글과 한자의 병용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는 단체였다. 한국어문교육연구회의 학술지인 <어문연구>4호(일조각, 1974.)의 「권두언」에서, 그는 학교교육에서 국한문혼용으로 교육하고, 국민의 일상생활에서도 국한문혼용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에도 일관되게 국한문혼용의 문장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은 우리민족 전체 누구나가 읽고 쓰기를 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 이희승 선생이 쓰신 친필 글씨(‘교만하면 도리어 손해를 불러오고, 겸손하면 오히려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을 지닌 글귀이다.)  ©브레이크뉴스
 
1980년대에 들어가 이희승은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인류역사를 보아도 언어가 같은 사람 사이는 서로 엉키는 힘이 작용하게 되어 있었다.(중략)지금의 분단은 역사방향의 역행이다. 그 역행이란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다. 강대국이 저희끼리 차치고 포치고 한 것이다. 우리 의견을 언제 묻기나 했던가, 그건 아주 부자연한 일이다. 부자연한 것은 물리학적으로 언제든지 자연한 상태로 옮겨가고야 만다. 부자연한 것에 걸려 있는 힘이 약화되거나 해소되면 뭉치고 만다. 그것이 내 신념이다.”(「원로탐방, 방송 요즘 어떻습니까, 이희승과 송정숙 대담」, <방송연구>7, 1983, 12, 52쪽.)

현재의 남북 분단은 역사의 진행방향에 역행하고 있기에,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이희승 선생의 유지는 오늘날 남북의 동포들이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  서울 동숭동에 있는 일석기념관   ©브레이크뉴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88년 3월 한국어문교육연구회의 회장직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1989년 11월 27일 향년 94세로 서거하였다. hispak@hanmail.net
 
*필자/박용규/한글학회 연구위원, 문학박사. 칼럼니스트


원본 기사 보기: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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