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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소임은 ‘정의국가’의 구현

정의와 애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선진국 건설의 초석

심상근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3/08/18 [21:28]

박근혜 대통령 소임은 ‘정의국가’의 구현

정의와 애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선진국 건설의 초석

심상근 칼럼니스트 | 입력 : 2013/08/18 [21:28]
이 우주, 이 세상에는 ‘신성(神性)’이 존재한다. 영어로는 아마Divine being쯤 될 것이다 (나의 이 이야기는 특정종교와 관련이 없으며, 내 나름대로의 우주와 인생에 대한 해석이다).
 
생물은 육신을 가지고 있으며, 고로 경쟁하고 잡아먹고 잡혀 먹히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우리 인간도 매일 소정의 영양분을 섭취하여야 하며, 이는 동물이건 식물이건 희생을 전제로 한다. 쇠고기를 먹고 생선을 먹고 파를 먹고 하는 것은 소와 물고기와 파의 입장에서는 인간을 원수로 생각하고도 남을 것이다. 즉 인간과 이들과는 ‘악연’으로 맺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사회 내에서도, 삼성전자가 휴대폰을 더 팔면 세계 어느 나라 어느 회사에서는 그만큼 휴대폰을 덜 팔게 되고, 이는 감원과 심지어 폐업을 야기한다. 기업과 기업 간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인간과 소, 인간과 물고기, 인간과 채소 사이와 같은 ‘악연’으로 맺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와 같이, 자기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여성은 다른 남자들 눈에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여성은 한 남자
▲ 심상근 박사  ©브레이크뉴스
만 사랑할 수 있다. 이는 역으로 남성에게도 적용된다. 현재 한국의 풍토에서는 기혼남자를 잡기 위하여 임신했다는 거짓말까지 하는 경우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변명인즉, 바람직한 남자들은 이미 모두 기혼이며, 그러므로 기혼남자를 노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의 논거였다. 남편을 빼앗기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논리이다.
 
그러므로 일견, 생태계는 상호 잡아먹고 잡혀 먹히는 지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알을 낳아 다른 새의 둥지에 밀어 넣어 대신 키우게 하는 새의 이야기에서부터 한국의 황당한 도덕상황에 이르기까지, 일견 세상은 지옥과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아무런 질서도 없고, 양심을 지키는 것은 바보짓이며, 마구잡이로 돈을 벌고 높은 자리 올라가고 정권을 잡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생각조차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질서가 존재한다.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선이 존재한다. 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생과 사(生死)에 대하여서는 집착을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늘의 뜻이고 운명이다. 수억의 정충이 난자를 향해 경쟁을 할 때 가장좋은 조건에서도 한 두 마리가 성공하여 잉태를 돕고, 나머지는 모두 폐사된다. 게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난 후 모래사장을 지나 바다에 이르는 경주에서, 오직 수십 수백 마리들 중 하나만 성공하고 나머지는 모두 새들에게 먹힌다. 여름휴가 캠핑텐트에서 자고 있던 일가족이 술 취한 자가 모는 차에 깔려 죽었다. 생과 사(生死)는 그러므로 집착과 애착을 가지는것이 무리이다.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살고 나머지는 하늘의 뜻으로 여기는 것이 원칙이다. 다른 길이 없다.
 
여기에서, 죽는 것이 진짜로 모든 것의 끝인지 아닌지는 인간이 수학문제처럼 답을 낼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많은 종교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교리도 있다. 혹은 난세를 떠나 진짜 천국으로 간다는 주장도 있다. 죽은 혼령과 통신을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주장들이 일체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 것도 무리가 있고, 그 주장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 것이 나의 견해이며, 나머지는 미지의 영역이고 종교의 영역이고, 각자의 선택이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예수를 믿고, 대부분의 중동사람들은 모하멧을 믿고, 인도인들은 부처를 공경하고, 많은 중국인들은 공자 혹은 관운장을 신으로 공경하고, 일본인들은 수백 수천가지의 신들 중 하나를 믿고, 한국인들은 그들 중 하나를 믿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나라건, 점성술, 무속인들, 점쟁이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믿고 안 믿고는 각자 선택이다. 그들 모두가 허구가 아닌지도 모르며, 그렇다고 그들 대부분이 신빙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인간은 미지의세계에서 헤매는 존재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 질서와 목표가 방향이 없이 헤매는것은 아니다. ‘정의’는 확실히 존재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각자의 운명은 하늘의 뜻이며, 정의는 그 각자의 운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각자의 운명은 하늘의 영역이며, 고로 미련을 버리고 담담할 수밖에없다. 아니면 인간으로서 성숙한 자세를 지닐 수가 없다. 담담할 수 있고 성숙할 수 있다면, ‘정의’를 논할 수 있다.
 
‘정의’는 ‘공동 선 (共同 善)’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한 국가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영역이다. 인간들이 아무리 문명을 발전시키고 온갖 것들을 발명하고 온갖 이론들을 만들어낸다 하여도, 국가가 기본적인 삶의 영역이라는 점은 불변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장담한다. 잘살건 못살건 내 집이 최고이고 내 나라가 최고이다. 일본의 가장 큰 죄는 이 사실을 지금도 부인하는 것이다. 한반도를 정복하여 전차를 깔고 이것 저것 신문명을 도입하고 가르치고 했다는 것은 조선을 식민지화한 죄에 대하여 아무런 변명도될 수 없다. 자기들보고 잘살게 만들어달라고 한 적이 없다. 한민족 어느 반역자가 일본제국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면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국가와 국민을 팔아먹은 것에 불과하다.
 
‘정의’는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자기 나라 안에서 ‘공동 선 (共同 善)’을 추구하는 것’이다. ‘공동 선 (共同 善)’은 무엇이냐? 나에게만 이롭고 나머지에게는 해로운 것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만 이로우면 되었지 왜 남들에게 해로운 것까지 생각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공동 선 (共同 善)’에 관심이 없는 자가 된다.
 
‘공동 선 (共同 善)’에 대한 유전인자는 모든 생물에게 주어져 있다. 이완용에게도 있다. 다만, 그 크기는 각자 다르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난 사람들, 가장 진화가 잘된 사람들, 가장 뛰어난 사람들, 가장 출중한 사람들에게는 ‘공동 선 (共同 善)’의 유전인자가 가장 크다. 이순신, 링컨, 박정희, 이건희가 그 예들이다. 이는 나의 객관적 평가이다. 이들은 우선, 보기에도, 인물로 생겼다. 그리고 눈이 정직하고 힘이 있다. 두뇌가 출중하다. 이들은 ‘유전인자 대박(jackpot)’에 속한다. 하늘은 그들에게 그러한 은총을 주는 대신, ‘공동 선 (共同 善)’ 유전인자도 가장 크게 박아놓는다. 곡간에서 인심 난다. 이에는 예외가 없다. 유전인자 잭팟이라는 곡간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세상에 대하여, 특히 자기 나라에 대하여 유달리큰 애국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
 
이들이 용 혹은 천사들이라면 많은 이무기들 혹은 마귀들이 존재한다. 용이 하나라면 이무기는 수백, 수천이다. 이들은 두뇌가 출중하되 모자람이 있다. 사고능력이 출중하되 모자람이 있다. 생긴 것도 그럴 사 하지만 모자람이 있다. 이들이 항상 해로운 존재는 아니다. 용들이 나라를 제어하고 ‘공동 선 (共同 善)’이 시행될 경우, 그리고 그 힘에 눌려 스스로 조심하며 사는 경우, 이무기들은 모자라나마 타고난 그들의 두뇌와 능력으로서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십 중 팔구, 백 중 구십구의 경우, 이무기들 즉 마귀들이 세상을 주름잡는다. 이들은 겉모양으로 보면 용 즉 천사들과 비슷하다. 우선 두뇌가 출중한 편이고보기에도 출중한 데가 있다. 적어도 1% 이내에 속한다. 그러므로 대부분, 특히 정의가 전혀 힘을 써본 적이 없는 한민족의 근천스러운 문화에서는, 거의 아무도 용과 이무기, 천사와 마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안 한다. 그러므로 수백 년 내내, 2013년 8월 18일 오늘까지, 한국은 마귀들이 세상을 운전한다. 이는 진실이다.
 
박정희는 이 문제를다룰 여유가 없었다. 굶어 죽는 민초들이 존재하던 정황에서 우선 경제부터 살려놓아야 했다. 그는 혁명동지들 사이에서 용을, 천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홀로 헤매다가 외롭게 갔다. 한민족의 경우, 문화속성 상, 용이 부상하는 것이 극히 힘들다. 박정희를 돕는 존재들은 이무기들이었다. 그러나 경제부흥의 바쁜 길에 박통은 이 것 저 것 가릴 사이가 없었다. 이무기들은 최소 두뇌는 있다.
 
용의 존재였던 박통은 이무기들의 악을 누르고 그들의 선만 선별적으로 사용할수가 있었다. 그가 떠난 후 그가 키워놓은 이무기들이 다시 한국을 난세로 몰아넣었다. 수천억 원씩 착복하고 혹은 정치이념이 전혀 다른 세력과 손을 잡기도 하였다. 모두가 돈 놓고 돈 먹는 게임이었다.
 
예수는 이무기들을 누르고 용들이 더 많이 활약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 것이 예수의 위대함이고 그의 가르침의 위대함이다. 그의 계명을 의역하자면 근본적으로 아래와 같다: "만약 네가 이방인을 대하기를 너의 친형제 대하는 것에 비하여눈곱만치라도 소홀하다면 너는 필히 지옥에 갈 것이다!" 이를 근 2천년 간 서양인들은 곧이곧대로 믿었다. 신부가 파문을 경고하며 십자가를 들이대면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무릎을 꿇고 소리를 내어 참회를 하며 용서를 구하였다. 파문을 죽음보다 더 무서워하였다. 그렇게 근 2천 년 살다 보니, 유전인자적으로 용으로 태어난 자들은 물론그 숱한 이무기들과 그리고 별처럼 많은 나머지 민초들 모두 일제히, ‘공동 선 (共同 善)’을 실행하게 되었다. 나의 친형제에게조차 눈곱만치도 선별적으로 호의를베풀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그 계명이 종교를 넘어 2천 년 간 문화와 도덕과 윤리와 생활습관이 된 백인사회에서는, 고로, 누가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도지사가 되고시장이 되고 군수가 되고 면장이 되고 통장이 되고 반장이 되어도 원칙적으로 ‘공동 선 (共同 善)’을 실천하게 되었다. 세상에 태어난 후 오직 그러한 풍경만보고 사는 경우, 그 것은 공기처럼 당연하고, 용이건 이무기건 민초건 대체로 그 규범을 따랐다. 그 것이 서구문명이 지구촌에서 가장 앞서고 강력하게 된근본적 이유이고, 아마도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예수는 위대하다.
 
나는 명색이 천주교신자이지만 그렇다고 예수를 믿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수가 곰방 태어나 세상사람들이 예수의 존재를 모르던 옛날도 아니고, 종교는 각자 자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공동 선 (共同 善)’을 논함에 있어서, 예수의 위대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와 같은 유일신의 문제점으로는, 심리학자 칼융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너무 기계적이고 직선적인 경향이 있다. 호랑이가 있는 사진을 보여주면, 동양인들은 호랑이를 보기 전에 좌우를 살펴본다. 서구인들은 우선적으로 호랑이를 본다. 그리고, 유일신을 맹종하던 습성으로 인하여, 만사에 무조건적으로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전쟁을 하건, 돈을 벌건, 그냥 치달리는 경향이 있다. 
 
그 반대가 중국인들이다. 중국에는 예수와 같이 겁을 주던 신이 없었다. 예수는 진짜로 겁나는 존재였다. 공자, 맹자, 순자 등은 ‘선생님’들이었다. 가르치기는 하였지만, 뭐를 안 지키면 지옥에 간다, 파문을 당하여 마땅하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고 겁을 주지 않았다. 그 선생님들은 가장 선의를가지고 ‘공동 선 (共同 善)’을 눈물로서 호소하였다. 콩나물 시루에 물 붓듯이 반복하여 가르쳤다. 방법은 달랐지만 중국문화는 서구의 문화 못지 않게 위대한 점이 있다. 등소평과 그의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등소평, 후진타오, 시진핑은 용들이다. 군자들이다. 이무기들, 소인들이 주름잡는 한국정치판과 그 점에서 판연히 다르다. ‘공동 선 (共同 善)’을 지향할 수 있는 용들이 대세를 잡을 만큼 중국의 문화는 높다. 문화가 아주 높지 않은 경우, 반드시 이무기들이 득세한다. 아첨과 아부와 달콤함으로 주군의 눈과 귀를 가리고 세상을 농락한다. 선조 왕 때부터 오늘까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순신이 그렇게 고초를 겪고, 아마 갑옷을 벗고 선상에올라 의도적으로 화살을 맞고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나면 이순신이라는 용은 선조를 에워싼 이무기들에게 처참히 당할 것은 100% 뻔했다. 그 것이 한민족의 역사이고 현실이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한민족의 문화는 근본적으로 예전 몽고족의 그 성급한 ‘상호약탈문화’이다. 그래서, 그 문화와 그 기질로 인하여, 여성들 중에는 의도적으로 기혼남자들만 쫓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 아내를 몰아내고 들어앉기 위하여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 부탁을 받고 펄펄 뛰며 거절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거짓말까지 해달라고 하느냐며 다투었다. 군산의 한 경찰이 죽이고 도망갔던 한 이혼녀의 경우에도 임신을 했다면서 이 것 저 것 요구를 했다는 정황이 있다는 기사가 뜬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민족, 한국의 경우, 그런 일은 백 배 이상 더 자주 일어난다. 늘 오던 개인적 편지 즉 사신을 오랜 기간 동안 당사자에게 전하지 않고 뜯어보면서 이용한 경우도 있다. 쉐익스피어도 상상하기 힘든 그러한 일은 한민족과 한국의 경우 일어난다.
 
한국이 잘되려면, 몽고처럼 한 때의 전성기가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으려면, 반드시 문화의 선진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박정희 큰박통도 손을 못 댄 부분이다. 이는 그러므로 당연히 작은박통 박근혜 대통령의 가장 큰 목표이어야 한다.
 
‘정의’는 ‘공동 선 (共同 善)’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예수가 지배하던 서구사회가 아니다. 중국 성현의 가르침도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한국과 중국은 문화적으로 크게 다르다. 중국에서도 이무기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은 용의 밑에서 제어를 받는다. 그 것이 중국문화의 위대함이다. 한국에서는 이무기들이 세상을 장악한다. 위에 있는 정치인들이 군자들이 아니다. ‘정치기술자’들이다. 낮이면 하루종일 전화로 쑥덕거리고 밤이면 술자리를 벌이며 자기들에게 이로운 구도를 조성하기 위하여 주야 365일 수작을 벌인다. 이무기들의 세상이다.
 
나는 2년 전부터 대충 한 가지 이야기만 반복하여 이야기하였다. "군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야한다!" 이는 중국성현들과 예수 모두가 지향하던 ‘군자론’이다.
 
예를 들어, 나는 최외출을 지금도 나무란다. 그는 비서실장 자리를 거듭 제안 받았지만 고사하였다고 기사에 떴었다. 그의 진솔함과 정직성과 점잖음은 이무기들로 그득 찬 한국정치계에서 예외적인 존재일 것이고 그는 들어서서 애국을 했어야 했다. 용기가 없었거나 애국심이 모자랐거나, 어쨌든 잘못된 일이었다.
 
그런 인물 대신 윤창중이 들어섰을 때, 나는 낙담하였다. ‘군자론’에 가장 배치되는 인물을 기용한 것은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지옥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시간문제일 뿐이다. 100% 장담한다.
 
물론 용들은 있다. 그러나 최외출처럼 모두가 짐짓 겸양을 구실삼아 조용히 있다. 실제로는, 이무기들이 무서운 것이다. 이무기들이 똘똘 뭉쳐 이기적 동기를 가지고 조성하는 정치지형에서, 공연히 나서서 미움을 받고박해를 받기 싫은것이다. 이기적이다.
 
진영의 경우도 나는 그러한 ‘약한 군자’로 분석한다. 6년 전 박근혜 전 당대표가 대선경선후보로 나서자, 그는 친박의 색채를 벗고 거리를 두고 물러갔다. 군자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호남에 뿌리를 둔 진영이 언젠가 새누리당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그는, 최외출처럼 약하면 안 된다. 애국은 반드시 용기가 필요하다. 어차피 한 번 나서 한 번 죽는 세상이다. 뭐가 무서운가? 남보다 잘난 사람에게는 애국은의무이다.
 
김동길 교수는 일찍이, 한국에는 정의가 없다, 한국인들은 정의를 모른다라는 의미의 발언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가 그런 발언을 했다면, 정곡을 찌른 것이고, 100% 진실이다. 예수의 나라와 공자맹자의 나라에 비하여 한국은 엄청 뒤떨어져 있다. 근본적으로 예전 몽고의 ‘상호약탈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순신이 고초를 받던 시절과 1%도 달라진 것이 없다.
 
게다가 오도된 정치이념으로 인하여, 야권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온갖 먼지를 일으키고 있다. 뭐라더라, 100년 만에 최대위기라고? 그래서 신부들도 나섰다고?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봐! 일본제국 식민지였던 시절, 봄이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은 괜찮았고, 지금 갑자기 100년 만에 최대위기로 생각되어 나선다고? 에라! 유치원생들도 동의하지 않을 소리를 하며 나라를 흔드는 그들을 생각하면, ‘공동 선 (共同 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정말로 갈 길이 멀다. sheem_sk@naver.com

*필자/심상근. 미 버클리대 박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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